기사제목 詩鏡 - 흔적 / 임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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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鏡 - 흔적 / 임경섭

기사입력 2014.06.2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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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詩鏡 - 시가 있는 목요일


안녕하세요. 박정자입니다.

‘시간은 묻지 않았는데도 모든 것을 말해주는 수다쟁이’라고 합니다. 그리스 철학자의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은 허공으로 사라지는 드라이아이스가 아니라 병에 담긴 포도주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오래 된 사진에서 풍기는 독특한 향기도 그런 때문 아닐까 싶고요.

‘시간의 흐름은 흔적의 깊이와 통한다’라고 써놓고 보니, 그대와 내가 함께 걷고 있는 골목길이 보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골목이 더 깊어지면 그 끝에서 환하고 큰 길을 만날 수 있겠지요. 거짓이라고, 그렇지 않다고 할퀴는 오늘의 상처도 그때엔 잘 발효되어 향기로운 흔적이 되겠지요. 


  
흔 적 / 임경섭

현관을 열었을 때 보았다
내가 몇 달이고 걸었을 길가의 모래뭉치며 흙먼지들이
쫓아와 너저분히 쌓여 있었다

벗으면 후드득 튕겨 나가는 지구의 살점들
현관마다 종적을 감춘 모퉁이들이 모여들어
지층을 만들고 있었다

저 무수한 시간의 뿌리들이 길어 올려 피워낸 것이
깊숙한 골목의 방 한 칸이라면
내 잠은 오늘 또 어떤 이의 금기 속으로 시들어야 할까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설계한 사람의
손금을 상상하기로 했다
그 손길의 무구와 무고가 동의어로 느껴질 즈음
네 쪽으로 흐르던 시간들이 범람하였다

우리는 한 번도 길을 따라 걸어보지 않았다고
길이 우리를 따라 몰려든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가 걸은 길들은 언제나 다정했으므로
적당한 모멸 또한 숨기고 있는 것이라고

시간이 흐를수록 골목이 깊어지고 있다
흐른다는 것, 혹은 깊어진다는 것
골목이 시간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다 

우리는 매일 낮아지고 있다
많이 걸어야 할 사람일수록 언덕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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