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미지의 섬, 백단향의 섬, 영혼의 섬 숨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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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섬, 백단향의 섬, 영혼의 섬 숨바!

기사입력 2014.04.05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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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현미(한국문인협회 인도네시아지부 회원)


  나는 이미 숨바의 독특한 장례방식에 대해 들었던 적이 있던 터라 망설임 없이 스케줄만 체크하고 참가 신청했다. 21일 새벽 4시 우리는 20명의 낯선 이들과의 여행에 대한 설렘과 긴장을 지닌 채 자카르타 공항에서 만났다. '오지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생경스런 호기심으로 불편함에 대한 각오는 했었다. 떠나는 그 순간은 언제나 호기심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말이다.

  나는 젊었었던 어느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벚꽃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던 그날 핸들을 꺾어 꽃길을 따라 그 눈부심 속으로 증발해버리고 싶었던 날이 있었다. 지긋한 책임감. 나는 숙제를 하고서야 비로소 밥을 먹고 놀 수 있는 어린아이였다. 어린 날 예민하게 돋아난 감성의 촉수가 칼이 되어 스스로의 가슴을 후벼팠고 새로운 것을 보면 그것이 전부인양 우주가 되어 나를 무겁게 누르던 날들이 있었다. 확실히 그 예민함은 사그라들었지만 나는 이제 핸들을 꺾을 수 있게 되었고, 나를 더 이상 후벼파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이렇게 떠날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가 말이다. 우리는 떠난다. 동부 누사뜽가라 (NTT) 소순다열도 숨바섬으로......

▲ 숨바섬 고인돌 마을 (사진제공: 한인니문화연구원)


첫째 날: 서숨바 따브로칸 공항 도착. 숨바 전통 가옥과 고인돌 마을 방문


  고고학은 목적지 없이 영원히 계속되는 탐구여행이다. 고인돌은 사람 사는 곳에 조상을 모시는 것으로 조상과 자손이 한 곳에서 살아가는 묘지의 한 방식이다, 몽골에서 사람들이 조상 무덤 곁에 가지 않으려는 것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서숨바의 따브로칸 공항에 도착했을 때 김 작가님의 분실된 짐과 초라한 공항은 이곳이 오지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고인돌 마을의 집들은 키가 높은 전통가옥으로 집 내부 지붕 아래 높은 곳에 시신을 안치한다고 했다. 5년마다 지붕의 짚을 갈아야 하는 수고로움에도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선사시대의 것들이라 그 변천사를 알기 어렵지만, 숨바의 고인돌은 아주 오랜 것과 최근에 세워진 듯한 시멘트로 만든 고인돌까지 다양하게 있어 그 형태와 문양의 변화를 아주 잘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문양이 얼마나 한국에서 발견되는 것과 흡사한지, 나 역시 여러 엔틱들을 접하며 문양을 접하다 보면, 옛사람들의 방식은 가끔씩 서로 물리적인 교류가 없어도 통하는 방식과 선호되는 문양이 비슷하다는데 놀란다. 닭이나 말 조각 등 토속신앙에서 선호 되는 문양들은 아주 한국적이기도 했다. 토속신앙이 여전히 숨바사회의 모습을 광범위하게 지배하고 있지만, 기독교인이 많음도 놀라웠다. 고인돌 위에 세워진 십자가는 내가 국사책에서 봤던 모습이 아니었다.

  서숨바는 동숨바에 비해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여, 먹고 자는 것이 불편할 수 있다는 설명에 숙소는 각오했으나, 잘만했다. 챙겨간 침대시트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잠시했다. 아무렇게나 뒹굴며 자유롭게 잘 수 있는 ''이기를 원하지만 나 역시 문명에 길들여진 존재이니 말이다.


▲ 숨바 문화탐방에 참여한 회원들 (사진제공: 한인니문화연구원)


둘째날: 빠솔라 축제 관람, 서숨바에서 초원지대를 거쳐 동숨바로 이동


  빠솔라는 '창을 던지다'라는 뜻이며 말을 타고 달리면서 상대편에게 나무 막대기를 던지는 전통적인 전쟁놀이다. 서숨바 사람들은 해마다 모내기 전 2~3월 중순까지 마을대 마을로 주민들이 모여서 빠솔라를 즐기며, 이를 위해 일년 동안 준비한다고 한다.

  이튿날 아침. 그 조용한 동네에서 숨바사람들은 물론 외부에서 온 사람들, 문화탐방팀, 외국인사진작가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금새 군중을 만들었다. 라또(제사장)가 전통복장으로 말을 타고 한 바퀴 돌면서 시작을 알리면 빠솔라가 시작된다. 좋은 자리를 잡느라 내려 쬐는 햇빛 사이를 오가다가 운 좋게 중국인 사진작가의 앞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출전하는 말들이 흥분해서 바로 앞까지 치고 들어오는가 하면 예리하게 다듬어진 대나무 창이 인파들 사이로 날아들어오기도 했다.

  상대편 팀에게 이기자 흥분인지 흥인지 모를 묘한 기운이 돌면서 전쟁놀이는 긴장감을 더해갔다. 우리 문화탐방팀들은 그날 안전상의 이유로 모두 빨간 티셔츠를 입고 움직였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형형색색의 이깟으로 치장한 전통복장, 머리장식도 특별한 구경이었다. 지나가는 남자의 허리춤에 걸친 이깟이 너무 예뻐서 하마터면 벗어달라고 할 뻔했다. 오후에는 서숨바에서 동숨바로 초원지대를 지나 5시간 이상 이동하는 긴 경로였다.

▲ 빠솔라 축제. (사진 = 한인니문화연구원) 


  난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버킷리스트처럼 꼭 가고 싶은 나라들이 있다. 몽골의 초원을 꼭 보고 싶었다. 초원에서 지는 노을이 지구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한 어느 작가의 말이 공감되어서이다. 어느 노을이든 아름답지 않은 노을이 있겠느냐만은, 그날 노을에 대한 나의 감흥이 각별한 탓이리라. 초원에서 게르(몽골식천막)를 치고, 노을을 보고, 별을 보고, 노래를 하면서, 몽골식의 수작업으로 일일이 색을 넣은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머리를 땋아 내리고 춤을 추고 싶었다.

  덜컹거리는 차, 긴 시간의 이동으로 피로가 몰려 올 즈음, 자연은 그렇게 우리에게 하나의 선물을 주었다. 언덕에서 바라보이는 광활한 초원. 노을지기 직전의 농도 짙은 황금빛 햇살을 받으며, 우리는 그 언덕에서 서로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서로의 얼굴에서 빛나는 보석을 보았다.

  이어진 여정에서 살짝 잠이 들었던 나는 수군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어머, 어머 별 좀 봐. 우주쇼를 하는 것 같아. 어쩜 이런 별은 본적이 없어... 세수를 막하고 나온 아이의 맑은 얼굴처럼 별들이 그렇게 총총히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나는 동료의 무릎에 누워서, 별빛은 그렇게 창밖에서 서로의 눈을 오래도록 맞추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밤바다 근처의 야외식탁에서 저녁을 먹었고, 시를 함께 음미했으며 아주 많이 행복해하였다.

▲ 숨바의 노을 (사진제공: 한인니문화연구원)


셋째 날: 숨바의 장례식, 숨바섬의 해변


  숨바의 장례문화는 독특하다. 부모의 장례식에 시집간 딸들은 가축을 가져와야 하고 아들의 처가에서는 이깟을 가져와야 한다. 장례식에 재물이 많이 들어가는 셈이다. 그리하여 장례식 치를 돈을 모을 때까지 시신을 집의 높은 곳에 모셔두고 함께 생활한다고 한다. 숨바사람들은 장례식에 마당 입구로부터 여자들이 먼저 한 줄로 서서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방으로 가서 빠빵강(장례식 때 말을 타고 고인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자로 노예신분임)들과 인사를 나누고, 남자들이 이를 따른다.

  숨바의 장례식은 축제 같았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왕족의 장례식이 있었던 날이었다. 많은 사람이 줄지어오고 있었고 원형의 장소를 마련하여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상주들은 오는 손님 하나하나 악수로 인사를 청했고 우리문화탐방 팀들을 보자 한국에서 왔다며 특별히 소개도하였다. 시중드는 아이가 정중히 인사하며 시리삐낭을 대접하여 예의를 갖추었다. (시리삐낭: 숨바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예의와 인사를 위한 기호식품으로 씹으면 입안이 붉게 입술까지 번진다. 맛은 쓰면서도 신맛이 난다.)

▲ 장례식 전경 (사진제공: 한인니문화연구원)


  머리에 붉은 천으로 장식한 소들이 줄지어 입장했고, 남자들은 괴이한 소리를 지르며 고인을 추모하는 것 같았다. 마치 영화 아바타에서 원주민들의 제사의식처럼 격앙된 몸짓과 목소리로 그들만의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장례가 축제인 것이 좋다. 아니 다시 말하면 장례가 슬픔인 것이 싫다. 그들의 어떤 의식과 관념들이 자신이 사는 공간에 시신을 모셔두고 또한 그 의식을 치를 때 축제처럼 하는 것인지, 한편으론 이해됨과 동시에 죽었을 때 가장 돈이 많이 드는 부족이라는 점은 내가 그들과 분명 다른 별에 산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자연주의자 스콧니어링은 그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자연으로 들어가 건강히 살기에 힘쓰다가 100세가 되던 해 죽음이 앞에 왔음을 느끼고 스스로 음식을 끊어 죽음에 이르렀다. 자연스런 죽음, 죽는 순간의 깨어있음과 담담하고 초연하게 죽음을 수용하는 자세••••••. 그리고 삶의 다른 일처럼 죽음을 환영해야 함을 말했다고 한다.

  어느 책에선가 본 "난 죽어서 내가 좋아하는 대머리 독수리의 먹이가 될 꺼야..."라는 글이 어린 나이에 꽤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 문화에서는 짐승의 먹이가 되는 것이 상대방을 저주하는 말이 아니던가 말이다. 하지만 자연의 순리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은 누군가의 먹이가 되는 일이다. 박테리아든 작은 벌레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간에 말이다. 그 작가는 유독 자신이 좋아하는 새의 먹이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때 일본에서는 고인의 뼈로 목걸이나 반지로 만들어 추억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그 업종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 뉴스를 보며 나는 할머니가 그리워졌다. 할머니는 내가 할머니 뼈를 지닌 것을 좋아하실 것 같은데 하며•••. 이렇듯 죽음에 대한 여러 생각에 다다르자, 집안에 12년 된 관을 모셔두고 생활하고 있는 흔적들. 밥그릇 국그릇 등 일상 도구들이 편안히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이들에게 죽음은 살아있는 자와도 소통을 나누는 일상의 일로 여겨지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축제인 장례식을 빠져 나와 해변으로 향했다. 숨바의 해변은 아직 미개발지로 천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해안 끝까지 보아도 아무 것도 없었다. 집 짓는 일이 직업인 나는 부지런히 머릿속에 스케치를 해나갔다. 잠깐 사이 그 해변에 몇 채의 집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행복한 상상이다. 맹그로브나무가 화석처럼 하얀 숲을 이루고 있었던 해변. 현지인의 말로는 80년대의 발리라고 하는데 아직 눈을 감으면 온통 하얀 모래와 옥빛으로 햇살에 반짝이던 모습이 강렬히 남아있다.

  해변에서 석양을 보고 싶었으나 이동거리 때문에 움직여야만 했다. 아쉬운 맘이 가득했는데 웬걸. 이동 중에 자연은 우리를 위해 따로 준비해 놓은 것이 있었다. 하늘에서 큰 새가 내려오고 있었다. 큰 울림이 가슴 속에서 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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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바의 해변. (사진 = 힌인니문화연구원)


영혼의 섬
             
이 인 상

과거에서 현세

현세 건너 내세에 묻힐 육신

떠나갈 영혼들을 달랠 사연 짊어 넣고

더 많이 더욱 깊게 담아 살아 숨쉬며

인도양 붉은 노을에 신비형상으로

얼혼 넋을 봉황새로 그려낸다.

숨바꼭질 하는 영혼의 섬 '숨바'

왕족과 평민들의 고인돌

닭 말 다양한 그림 암각화 지석묘

큰 돌멩이들이 돌멘(Dolmen)자리를

조상과 자손들이 마당에 들려넣고

윗통 벗고 온몸에 걸칠 "이깟"을 짠다.

혼백들이 모여 사는

미지섬 "숨바"(Sumba)

이 저녁 무렵 함께했던 우리들의 시간을 추억하며 이인상 교수가 써 준 시이다.

▲ 숨바의 할머니 (사진제공: 한인니문화연구원)


넷째 날: 이깟 구경, 발리에서 버스여행 후 자카르타 도착


  이깟(숨바인들이 짜는 천으로 이깟 문양에는 그들의 역사와 생활상이 그대로 표현 된 것으로 상당히 중요하다.) 3일 동안 이깟을 잠깐씩 구경했었다. 숨바족 할머니가 실리삐낭으로 입술을 빨갛게 물들인 채 일일이 채취한 목화를 다듬는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꼭 우리 할머니를 보는 것 같았다. 얼굴 생김, 젖가슴모양까지 울 할머니를 꼭 닮은 숨바족 할머니. 한가닥 한가닥 새겨 넣었을 문양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 바두이족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충동구매를 거의 하지 않는 탓에, 사지 않고 온 이깟이 내내 맴돌았다.

  숨바에서 산 이깟 3점은 이미 나의 집 한 켠이 되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자카르타로 오는 여정은 비행시간의 계속된 연기로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에 와서 큼지막한 통에 담긴 세안크림을 듬뿍 덜며, 오랜 잠옷의 익숙한 보드라움을 느끼며, 일상으로의 복귀를 실감하였다.

  이번 숨바탐방은 이동시간과 식사를 세밀히 짜기 힘들었으므로 박선이 수석문화탐방팀장, 김성월 작가는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원래 예상대로 되지 않은 일정은 따라가는 사람보다 이끄는 사람이 더 힘든 법이다. 그 힘든 부분을 강희중 회장과 이인상 교수가 넉넉함으로 채워주셨다. *인니문화원과 대가없이 애쓰신 모든 분께 그 특별한 감사를 전한다.

  불편한 자리를 서로 바꿔가며 차량 이동을 했는데, 나는 이를 스탠딩 파티처럼 즐겼다. 여러 사람과 소통하며, 처음의 낯설음이 없어지고 각자의 개성을 지닌 친밀한 우리가 되었다. 편하게 보려면 TV여행프로를 보면 된다. 산을 왜 힘들게 올라가는가 말이다. 그 위에 무엇이 있다고? 우리는 덜컹거리는 차 안, 햇빛 내리쬐는 광장과 해변을 걸으며 여행을 나선다.

  여행이 끝났을 때 우리는 놀라운 기억의 필터링을 경험한다. 피곤했던 기억은 없고 그 찬란했던 짧은 순간, 자신과 교감했던 진한 찰나의 순간만이 남아, 결국은 한 방울의 향유가 되어 우리의 삶을 향기롭게 한다는 것을 말이다.

▲ 이깟 (사진제공: 이인선 한인니문화연구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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