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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인니 관계 물꼬 뜬 주역, 베니 장군과 소피안 회장”

기사입력 2026.02.0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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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니 관계 물꼬 뜬 주역, 베니 장군과 소피안 회장”

글: 신성철 데일리인도네시아 발행인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외교 관계는 1973년에서야 대사급으로 격상되었다. 그 과정에는 양국 관계의 물꼬를 트고 실질적인 토대를 마련한 인물들이 있다. 이들이 쌓아 올린 기반 위에서 이후 제도와 협력 시스템이 구축될 수 있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는 최계월 코데코(KODECO, 1919~2015) 회장을 비롯한 한인 인사들과, 인도네시아 측의 대표적인 지한파인 베니 무르다니(Benny Moerdani, 1932~2004)와 소피안 와난디(Sofjan Wanandi, 1941~)를 들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인도네시아의 주역에 대해서 기술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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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 무르다니 장군 [자료사진]

 

베니 장군과 소피아 회장은 서로 다른 배경을 지녔지만, 공통점이 분명했다. 첫째, 두 사람 모두 대표적인 지한파 인사였고, 둘째, 공식 외교관계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던 시기, 개인적 신뢰와 네트워크로 양국 관계의 토대를 닦은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베니 장군은 인도네시아 현대사에서 군과 정보, 외교를 아우른 상징적 인물이다. 그러나 한국과의 관계에서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직책이나 권력이 아니라 사람을 통한 외교였다. 그는 1970년, 아직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기 이전에 제2대 주한 인도네시아 총영사로 부임했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먼저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한 북한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었고, 한국은 외교적으로 우선 순위가 높지 않은 국가였다. 서울 주재 인도네시아 공관은 총영사급에 불과했고, 예산과 인력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베니는 이 조건을 한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를 ‘관계 형성의 기회’로 활용했다.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정치인과 관료, 기업인을 직접 만나며 신뢰를 쌓았다. 단순한 외교 업무를 넘어, 한국 사회를 이해하려는 태도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그가 서울을 평양과 동급의 외교 파트너로 격상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제도적 결정 이전에 이미 인적 신뢰가 형성되었기에 가능했다. 이후 1973년 인도네시아가 한국과의 관계를 대사급으로 승격시킨 배경에도, 베니의 활동이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는 평가가 많다.


그는 단순한 외교관이 아니었다. 군인 출신답게 실무에 강했고, 동시에 인간관계를 중시했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개인적 친분, 한국 군·정계 인사들과의 교류는 이후 양국의 군사·경제 협력으로 이어졌다. 한국산 무기와 군수물자 도입, 에너지 협력, 자원 개발 참여 등도 이 시기에 길이 열렸다.


1970~80년대 인도네시아 군부의 실권자이자 국방부 장관을 지낸 베니 장군은 인도네시아 내 한인 사회가 발전하고 코데코 등 현지 한국 기업이 성장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특히, 코데코 최계월 회장과 한국의 첫 해외 유전 사업인 서부 마두라 유전 개발 사업 등 경제협력에 있어 핵심적인 협력자 역할을 했다.


김문환 전 한인뉴스 논설위원은 베니 장군에 대해 “1974년 1월 소위 ‘말라리 사건’(Malari Incident)이라고 부르는 ‘반일폭동’ 직후 본국으로 급거 귀국한 이후 줄곧 인도네시아의 모든 정보 권력을 장악했던 실세였다”며 “곤경에 처한 한국 진출기업에도 여러 차례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물론, 인도네시아 정부 차원의 정책 시행을 통해 양국간의 외교와 경제교류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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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안 와난디 회장

 

베니 장군이 정치·군사 영역에서 길을 닦았다면, 소피안 회장은 경제와 민간 교류의 영역에서 그 길을 확장한 인물이었다.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출신인 소피안은 인도네시아 경제계에서 보기 드문 조정자였다. 기업인, 정치인, 외국인 투자자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며, 특히 한국 기업들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는 한국 기업들이 인도네시아에 진출하던 초창기부터 조언자이자 후견인 역할을 했다. 제도도, 정보도 부족했던 시절, 한국 기업들이 의지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현지 인사였다. 실제로 수많은 한국 기업인들이 그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도네시아인”으로 기억한다.


소피안은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었다. 그는 인도네시아경영자총협회(APINDO) 회장을 지내며 정부와 민간, 국내와 외국 기업을 연결했다. 특히 한국 기업이 현지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문화적·제도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지한파’로 불리는 이유는 단순한 친분 때문이 아니다. 한국 경제의 성장 과정과 산업 구조를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인도네시아 발전 모델과 연결하려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호영 전 주인도네시아 대사(2008.6~2011.3)는 2011년 발행된 소피아 와난디 평전(그라메디아)에 "한국 기업인들 사이에서는 소피얀 회장을 존경의 의미로 ‘빡 회장님(Pak Hoe Jang Nim)’ 또는 ‘Mr. Chairman’이라 부른다"며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인들에게 조언과 지침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조언자 역할을 했고, 한국 기업과 인도네시아 정부 사이의 소통 창구 역할도 맡았다"고 썼다.


외교관 이전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


오늘날 한·인도네시아 관계는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불린다. 그러나 이 관계가 처음부터 제도적으로 완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초창기에는 외교 인프라도, 제도적 틀도 부족했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은 사람과 사람 간(People to People) 교류와 신뢰였다. 베니 장군은 국가와 국가 사이의 통로를 열었고, 소피안 회장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리를 놓았다.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오늘날처럼 외교 시스템이 정교하지 않았고, 정치·경제·군사 영역이 뒤섞여 있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개인의 판단과 신뢰가 국가 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지금보다 훨씬 컸다. 그들이 없었다면, 한국과 인도네시아 관계는 지금과는 다른 궤적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외교는 문서와 협정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국가 관계의 초기 단계에서는 사람이 곧 외교다. 베니 무르다니와 소피안 와난디는 그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제도가 미비하던 시절, 이들은 신뢰와 인간관계로 두 나라를 연결했고, 그 토대 위에서 오늘의 한·인도네시아 관계가 형성되었다. 지금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것은, 그들이 남긴 ‘성과’보다도 관계는 결국 사람이 만든다는 오래된 진실일 것이다. [데일리인도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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