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수카르노의 부인들(9): 가나세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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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카르노의 부인들(9): 가나세의 저주

기사입력 2025.09.0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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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카르노 데위.jpg
수카르노 대통령과 데위 수카르노 여사 [자료사진]

 

[편집자주] 본지는 '수카르노의 부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칼럼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기고자인 김문환 칼럼니스트는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 대표 집필자이자 『적도에 뿌리내린 한국인의 혼』의 저자이며, 오랫동안 재인도네시아 한인뉴스 논설위원으로 활동해왔습니다. 서방 언론에서 ‘미치광이’, ‘공산주의자’ 등으로 폄하되었던 20년 집권 독재자의 사생활 뒤에는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었을까요? 데일리인도네시아를 통해 그 전모를 하나씩 풀어봅니다.


수카르노의 부인들(9): 가나세의 저주


수카르노는 네모토와 함께 2주간의 발리 여행을 마치고 자카르타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1년 전 인도네시아에 들어와 있던 가나세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한편 가나세 역시 달라진 수카르노의 태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신 말고도 또 다른 일본 여성이 대통령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가나세는, 1959년 10월 3일 자카르타 자택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결혼한 지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하물며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같은 일본 여성이라니.”


심한 배신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나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범하기로 이름난 정치 지도자였지만,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수카르노는 절망에 빠져 시신 곁에서 한없이 흐느껴 울었다. 그는 측근들에게 철저한 보안을 명령하고, 가장 신임하는 경호실장 사부르(Sabur) 장군에게 극비리에 시신 수습을 맡겼다. 사부르 장군은 심복 몇 명을 대동해 다음날 한밤중, 자카르타 남부 지역 끄바요란바루(Kebayoran Baru) 블록 뻬(Blok P) 공동묘지에 가나세의 시신을 서둘러 매장하고 철저한 함구령을 내렸다.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적도의 나라로 날아온 가나세. 본명은 ‘가나세 사끼꼬’, 인도네시아식 이름은 ‘살리꾸 마이사로’, 애칭은 ‘바수끼 부인’이었다. 여러 이름을 지녔으나 꿈을 펴보기도 전에 이국땅에서 한 줌 흙이 되어버린 그녀. 얼마나 깊은 원한을 품었기에, 그로부터 몇 년 후 기이한 일들이 잇달아 벌어졌던 것일까.


3년이 흐른 1962년 3월, 수카르노는 네모토의 생일날 대통령궁 내 회교 사원에서 종교부 장관 입회 아래 극비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네모토는 이 소식을 도쿄에 사는 홀어머니에게 알렸지만, 믿기 힘든 비극이 뒤따랐다. 전시를 견디며 애지중지 키워온 딸이 외국인의 둘째 부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접한 어머니는 하루 만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모친이 세상을 떠난 지 불과 26시간 만에, 네모토의 마지막 혈육이던 남동생 얏쏘마저 ‘가문의 수치’라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네모토는 큰 충격을 받아 식음을 전폐하며 거의 폐인 상태에 이르렀다. 이듬해, ‘데위’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던 그녀의 23번째 생일에 수카르노는 위로의 뜻을 담아 큰 선물을 준비했다. 자카르타 시내 가똣 수브로또 거리 인근 3헥타르의 땅을 하사한 것이다. 이 부지는 이후 5헥타르로 확장되었고, 청구권 자금을 통해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이 기부금을 모아 데위가 거주할 저택을 지었다. 수카르노는 자살한 남동생을 기리기 위해 그 저택에 ‘야소의 집(Wisma Yasso)’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20여 년이 흘러 사건이 잊혀갈 무렵인 1977년, 본국의 가족들이 총영사관의 도움을 받아 가나세의 유해를 수습해 갔다는 기사가 신문에 짧게 보도되었다. 가나세가 묻혔던 공동묘지는 현재 남부 자카르타 구청 부지다. 청사 신축을 위해 묘소는 모두 이장되었지만, 그 자리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가나세의 저주’를 떠올리며 국적을 넘어선 연민을 느끼곤 한다. -계속-  [김문환 / 칼럼니스트]

 

▷ 주(註): 가나세의 죽음은 위와 같은 맥락으로 전해져 왔으나, 2015년 일본 니코니코TV 방송에서 다른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일본 야쿠자가 동원된 타살설이다. 배경에는 가나세와 네모토(데위)를 각각 후원한 야쿠자 조직과 연계된 상사(商社) 간의 이권 다툼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두 일본 여성이 동시에 수카르노 주변에 머물면서 질투와 경쟁심이 불거지고, 이로 인해 수카르노의 사생활이 외부에 노출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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