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본지는 수카르노의 부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칼럼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기고자인 김문환 칼럼니스트는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 대표 집필자이자 『적도에 뿌리내린 한국인의 혼』의 저자이며, 오랫동안 재인도네시아 한인 뉴스 논설위원으로 활동해왔습니다. 서방 언론에서 ‘미치광이’, ‘공산주의자’ 등으로 폄하되었던 20년 집권 독재자의 사생활 뒤에는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었을까요? 데일리인도네시아가 그 전모를 하나씩 풀어봅니다.
5. 마샬 플랜과 원탁회의
미국은 네덜란드에 ‘인도네시아에서 철수하든가, 아니면 마샬 플랜(유럽부흥계획) 원조를 포기하라’는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결국 네덜란드는 미국·벨기에·호주를 증인으로 다자협상에 나섰고, 이른바
‘원탁회의(Konferensi Meja Bundar)’가 헤이그에서 열렸다.
인도네시아 대표단 수석인 모하맛 핫따는 2개월여의 협상 끝에 협정서에
서명했고, 1949년 12월 27일 ‘인도네시아연방공화국(Republik Indonesia Serikat)’이
탄생했다. 네덜란드는 서부 파푸아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철수했고, 임시
거처를 그곳에 마련했다.
다음 날인 12월 28일, 족자카르타 임시수도에서 자카르타로 환도한 수카르노 정부는 명실상부한 독립국가로서 기능을 시작했다. 미국과 인도 등 여러 나라가 경쟁적으로 대사를 파견했고, 대한민국도 12월 30일 인도네시아를 국가로 승인하며 외교 관계를 시작했다.
수카르노는 민심을 다지고 국가 기틀을 세우기 위해 전국을 순방하며 특유의 연설 정치에 나섰다. 내정은 주로 핫따 수상이 맡았다. 당시 수카르노의 연설이 라디오에서
방송되면, 인력거꾼들이 길가에 차를 세우고 와룽(Warung, 간이식당)에 들어가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흔했다.
하르띠니와의 만남
성격상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던 수카르노는 지방 시찰을 자주 다녔다. 1952년 초, 대통령 일행이 중부자바 스마랑에서 족자카르타로 가던 중 살라띠가 시청 식당에 들렀다. 그곳에서 그는 뗌뻬(Tempe, 발효 대두 식품) 튀김과 채소로 점심을 하던 중, 서빙을 하던 한 여인에게 눈길이 갔다.
“부인, 남편은 무슨 일을 합니까?”
“의사였지만 이혼했습니다.”
“아이들은요?”
“다섯 있습니다.”
수카르노는 젊고 아름다운 그녀가 다섯 아이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물었고,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하르띠니’라고 밝혔다.
이후 수카르노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으나 답이 없자, 친구 수하르죠
장군을 보내 직접 만나게 했다. 하르띠니는 결국 조건부로 구혼을 받아들였다. 화뜨마와띠 영부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혼은 하지 않고, 자신은
제2부인으로 변두리 별궁에서만 지내겠다는 것이었다.
갈등과 결별
그러나 화뜨마와띠는 중혼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장남만 데리고 대통령궁을 떠나 끄바요란 바루의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이 주택은 훗날 장남 군뚜르에게 상속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수카르노는 3년이 지난 1956년에야 이혼 절차를 마쳤다.
대통령의 재혼 소식이 알려지자 여성단체들이 거리 시위에 나섰고, 언론도
비판적으로 돌아섰다. 국민당(PNI)은 중혼금지법을 추진했지만, 수카르노의 정치적 영향력에 밀려 무산됐다.
궐석혼인과 이후
하르띠니와의 결혼식은 보고르 뒤편 찌빠나스궁에서 ‘궐석혼인식’으로 치러졌다. 대통령은 불참했고, 경호 책임자인 망일 대령이 대신 참석했다. 하르띠니는 1970년 수카르노 사망 때까지 호적상 부인 자격을 유지한 두 사람 중 하나였다. 또 다른 한 사람은 19세에 일본에서 온 데위 여사였다.
1960년대 초, 미국의
가십 칼럼니스트 신디 아담스(Cindy Adams)가 수카르노 자서전을 집필하며 “가장 영부인다운 인물은
누구인가”라고 묻자, 그는 하르띠니를 조심스레 꼽았다. 하르띠니는
절제된 생활을 유지했으나, 수카르노의 여성 편력은 계속 확장되어 갔다.
-계속-
[김문환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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