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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도네시아에서 두 개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

인도네시아, 천개의 이야기
기사입력 2025.09.23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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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에서 두 개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

글: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장

 

1940년대 중반, 태평양 전쟁의 종전은 인도네시아에 독립을 향한 격렬한 움직임을 불러왔다. 이 격동의 시기, 그 땅에 머무르고 있던 조선인 군속(軍屬, 군무원)들은 자신들 또한 식민지 출신으로서 타국의 식민지에서 활동하며, 조국의 해방과 발을 딛고 있는 땅의 독립이라는 두 갈래의 역사적 과제에 동시에 직면하는 독특하고 복합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일본은 인도네시아에 군대와 함께 군의 업무를 보조하는 군속을 파견했다. 군속은 비전투 요원으로 역할을 수행한 조선인들로, 일본군 포로감시원, 동맹통신사 파견원(기자), 항만 노동자, 농장 직원, 간호사,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민간인이었다.

 

이들은 단순히 전쟁의 여파를 피해 체류한 인물이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그 시기와 대면하고 선택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선택이 과연 온전한 자유 의지에 따른 것이었을까? 아니면 전범 처벌을 피하거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강요와 맞물린 결과였을까? 그럼에도 조선인 군속들의 활동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국과 인도네시아 관계의 역사적 배경 중 하나로 자리하고 있다.

 

다양한 진영, 복잡한 정체성

전후 혼란기 인도네시아에 체류하던 조선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친 네덜란드 또는 친 중국 노선을 따라간 인물들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하에서 군속으로 활동했으나 종전 이후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와 연결된 인물들이었다.

 

친 네덜란드 또는 친 중국 노선

장윤원은 1920년 자바에 정착해 네덜란드 식민정부의 관리로 활동했다. 그는 화교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선인 군속들의 귀환을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의 귀국도 미루고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의 석방을 위해 힘썼고, 귀환을 원하는 민간인들의 생계까지 도왔다.

 

장윤원 선생과 중국인 부인, 자녀들 재인도네시아 한인100년사 편찬위원회.jpg
장윤원 가족 [출처: 재인도네시아 한인100년사]

 

조선인 포로감시원이었던 김만수는 연합군 포로, 특히 네덜란드인 포로들에게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했고, 이에 전후 네덜란드 정부는 그에게 표창과 사업 이권을 수여했다.

 

이활(이억관 또는 이운종)은 자카르타의 화교 사회와 협력하며 고려독립청년당을 결성했다. 그는 김구 주석의 인가를 받아 조선 독립운동을 추진했고, 자카르타의 조선인민회 건물 앞에 태극기를 게양하기도 했다.

 

일본군 포로감시원에서 인도네시아 독립군으로

 

또 다른 부류는 일제에 협력했던 이력에도 불구하고, 종전 이후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 참여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이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가담한 배경에는 전범 처벌을 피하려는 의도와 더불어, 현지인 배우자와 자녀를 둔 경우처럼 현지에 기반을 잡은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선택은 단순히 이러한 이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복합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

 

허영은 일본에 귀화한 이력이 있었지만, 전쟁이 끝난 뒤 수카르노 망명정부의 공보 담당관으로 활동하며 연극과 영화를 통해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했다.

 

허영의 묘비 2005 독립기념관.jpg
허영 묘비 [출처: 독립기념관]

 

양칠성, 국재만, 정수호는 모두 일본군 포로감시원 출신이었으나, 종전 후 인도네시아 국민방위군(TKR) 산하 '빵에란 빠빡 부대'에 합류해 네덜란드에 맞선 전투에 참여했다.

 

유홍배 역시 비슷한 경로를 밟으며, 일본군 장비를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넘기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전범으로 처벌받을 위협 속에서 과거의 이력을 덮기 위해서 새로운 정치적 진영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시기에 주어진 조건과 현장의 상황 속에서 선택을 내렸고, 그 선택은 종종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기도 했다.

 

재자바조선인민회’와 동포 보호

 

허영은 1945년 9월 1일 자카르타에 ‘재자바조선인민회’(이하 민회)를 세우는 데 앞장섰다. 그는 일본군 제16군 사령부를 오가며 조선인 군속 석방과 단체 결성을 설득했고, 이 조직은 조선인의 귀환과 생계 지원을 위한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민회는 당시 일본군과 협상을 통해 3년치 군표와 물자를 확보하여 생활 기반을 제공했고, 조선어 교실과 『조선인 민보』 발간을 통해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켜나갔다.

 

민회는 일본의 패전과 함께 귀국선을 기다리던 조선인들에게 일시적이지만 중요한 버팀목이었으며, 단순한 향우회나 친목단체를 넘어 정치적이고 실질적인 임무를 수행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민회는 조선인들이 인도네시아 독립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생존을 도모하는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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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자바 조선인민회 반둥지부 [출처: 안승갑 회고록]

 

조선과 인도네시아, 두 독립을 향한 병렬적 투쟁

 

조선인 군속들의 선택은 조선 독립과 인도네시아 독립이라는 두 전선에 병렬적으로 걸쳐 있었다. 고려독립청년당은 일본군에 맞서 봉기를 시도했으며, 김구의 인정을 받은 공식 조직으로 활동했다. 동시에,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해 무장 저항에 나선 조선인들도 존재했다. 이들은 네덜란드가 식민 지배를 재개하려는 움직임에 저항했고, 그 가운데 일부는 끝내 목숨을 잃었다.

 

양칠성, 국재만, 정수호는 1949년 네덜란드군에 의해 사형당했다. 전후의 혼란 속에서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을지라도, 그들의 죽음은 인도네시아 역사에 또 다른 이정표로 남았다.

 

양칠성길.jpg
서부자바 가룻군이 양칠성을 기념해 만든 양칠성길 [데일리인도네시아 자료사진]

 

 

귀환하지 못한 사람들

몇몇 인물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허영은 귀환하지 않고 인도네시아에 남았다. 인도네시아 한인사 전문가 김문환은 자신의 저서에서 허영에 대해 과거의 행적에 대한 자책과 전범 색출의 두려움으로 귀국을 포기했고, 일본으로도 돌아가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며. 그를 “국제미아”라 표현했다.

 

양칠성의 선택도 유사했다. 그는 귀국선을 타지 않고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가담했다. 그의 마지막 편지에는 “이제 제가 고국에 들어가면 무엇을 하겠습니까?”라는 문장이 담겨 있다. 과거와 단절된 삶 속에서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웠던 당시의 불안과 무력감이 느껴지는 구절이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 역사학자 우스미 아이코는 일부 조선인 군속과 일본군인에게 현지 부인과 자녀가 있었다며,  그들의 투쟁에 인도네시아인들과의 연대 의식 또한 작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러한 삶의 궤적은 개인의 선택으로만 볼 수 없는 구조적 조건과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복잡했던 그들의 삶과 선택은 단순한 역사의 기록을 넘어, 격동의 시대 속에서 개인이 감당해야 했던 고뇌와 희생을 보여준다.

 

유산으로 남은 이야기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한 조선인 군속들의 이야기는 한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자주 조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흔적은 오늘날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형성한 우호 관계의 기저 중 하나로서 존재한다.

 

이들은 단일한 정체성이 아닌, 복합적 위치에서 현실과 이상 사이를 넘나들며 선택했고, 그 과정에서 전형적인 영웅담이나 비난받을 과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다층적 역사의 주체로 남았다. 

 

이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타국에서 민족의 이름으로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이 질문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날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도 유효하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해 되돌아보게 한다.

 

다시 우리는 묻는다.

“그들은 누구의 독립을 위해 싸웠는가?”

“그 선택은 어떤 흔적으로 남아 있는가?”

 

역사는 늘 국가의 이름으로만 쓰이지 않는다. 그곳엔 개인의 궤적, 침묵, 그리고 때로는 삶 전체가 자리한다. 인도네시아에서 두 개의 독립을 위해 살아갔던 조선인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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