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에 왔나?”
글: 데일리인도네시아 발행인
대한민국은 1960년대 외환보유고가 1억 달러 남짓할 정도로 국가 재정이 형편없었던 시기에 인도네시아에 최초로 해외직접투자(FDI)를 과감하게 실행했다. 해외직접투자를 결정하는 데는 많은 요인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대한민국은 왜 인도네시아를 선택했을까?
해외직접투자를 하려면 기업이 갖고 있는 인력, 자본, 자원, 기술, 경영 등 유무형의 자산뿐만 아니라 투자국의 자원과 노동력, 정치적 환경 등 많은 요소들을 기본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대인도네시아 FDI에는 정치·외교 등 다양한 요인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 글은 한국의 대인도네시아 해외직접투자에서 크게 작용한 정치·외교정책적 요인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석유, 천연가스, 석탄, 철, 니켈 등 천연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은 주요 자원을 수입하지 않고서는 성장할 수 없는 구조적인 경제 취약성을 갖고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립경제체제를 구축해야하는 당면과제를 갖고 있다. 1962년부터 시작한 우리나라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산업화의 초석을 다지는 시기이다. 특히, 합판산업은 1960~1970년대 대표적 수출산업으로 대한민국 산업화를 견인했고 전 세계 합판 수출량 20% 이상 점유했던 우리나라 최대 수출 효자산업이었다. 1960년대 한국은 합판생산을 위한 원자재를 공급하던 필리핀과 말레이시아가 원목 수출을 단계적으로 금지하자 새로운 공급처를 물색해야 했다. 인도네시아가 낙점됐다.
동서냉전기인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비동맹 창설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도네시아에서 우리나라는 북한과의 외교전에서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1960년 6월 인도네시아측은 우리 친선사절단 방문을 거부했으며, 이어 1962년 3월에 우리 경제사절단 입국을 거부한 것으로 1962년 7월 한국 외무부 문서에 기록되어 있었다. 1961년 북한과 인도네시아는 영사관계 수립과 1964년 대사관계를 수립하는 등 외교관계가 진전됨에 따라 인도네시아는 대한민국과의 관계 구축에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63년 일본과 인도네시아에서 정관계 인맥이 있던 최계월 ㈜한국남방개발(현 KODECO) 회장의 주선으로 도쿄에서 수카르노 대통령과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의 만남이 극적으로 성사시키면서 양국 관계는 급물살을 탔다. 1965년 인도네시아 정변(G30S)으로 인도네시아공산당(PKI)이 붕괴되고 친미·반공 노선의 수하르토 정권이 들어서면서 인도네시아 북한 간의 외교관계가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과 인도네시아 관계개선의 환경이 조성됐다. 1966년 12월 자카르타에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설립됐다. 대사급 외교관계가 수립되기 이전인 1968년 대한민국 최초 해외직접투자가 인도네시아에서 이루어지면서 현지에서 우리 기업이 위대한 첫발을 내딛는다.
1973년 9월 18일,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공식 수교하면서 한국의 투자에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1970년대 오일쇼크의 쓰라린 경험을 한 한국은 인도네시아에서 자원 확보를 위한 투자와 건설 및 무역 분야의 진출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 시기에 코린도(KORIDO)를 비롯한 원목개발회사와 대림산업, 현대건설 등 건설 부문, 미원인도네시아, 삼성물산 등 종합상사가 진출했다.
인도네시아 정관계 인사들과의 교분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베니 무르다니는 1971년 당시 육군 대령으로 제2대 주한 인도네시아 총영사로 부임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는다. 그는 3년여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 문화와 언어를 배우고 한국인과 친근하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3년 양국 관계가 대사급을 격상하면서 현역 군인 신분으로 대리대사로 근무했다. 1974년 1월에 본국으로 귀임해서는 국방부 정보국장, 통합군사령관, 국방부 장관 등 핵심 요직을 맡았던 베니 장군은 수하르토 정부의 군부 실세로 한국기업을 후원했으며, 현지 한인들과 교분관계가 두터워 한국의 탄약과 전투복 등 방산제품 수입하는데 기여했다. 또 한국의 서부 마두라 유전 개발 참여에 큰 역할을 하는 등 양국 군사 및 경제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마침내 1981년 코데코에너지와 인도네시아 국영석유회사 뻐르따미나 간 체결된 서부 마두라 유전 공동개발 사업이 승인됐다.
1981년 6월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전두환 대통령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양국 관계 발전과 경제협력 방안을 폭넓게 논의하였다. 이듬해 1982년 10월에는 수하르토 대통령의 답방이 있었는데, 이는 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는 최초의 한국 방문으로, 양국의 협력과 신뢰 관계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5년 이후 대한민국은 자원개발을 뛰어넘어 신발·봉제 등 노동집약산업을 필두로 제조업 부문에 투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11월 8일부터 닷새 동안 인도네시아를 공식방문했다. 노 대통령과 수하르토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서부수마트라 주도 빠당(Padang) 시 도로 건설 등 인프라 구축을 한국 정부가 유상지원하기로 하는 한편, 인도네시아의 제5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89~1993년)에 한국의 자본 기술이 참여하기로 합의하였다. 또 한국 기업의 인도네시아 진출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의 하나로 투자보장협정의 조기 타결 및 자원 공동 개발을 장려하기로 했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인 2006년 12월에 양국 외교관계가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돼 정치·경제·방산·문화·인적교류 등 전면적으로 확대된다. 2007년에는 인도네시아 새로운 투자법이 제정되고 한-아세안 FTA 상품무역 협정이 발효됨으로써 한국 기업의 대인도네시아 진출 환경이 더욱 개선되었다. 2007년 7월 유도요노 대통령이 국빈 방문하여 대인도네시아 투자 관련 16개의 업무협약(MOU)가 서명되었고, 양국 간 에너지·자원 분야 협력을 활성화하고 새로운 투자 사업을 발굴하기 위한 ‘제1차 한-인니 포럼’이 개최됐다.
이명박 대통령(2008~2013년)과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2004~2014년) 간 관계는 각별했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재임 중인 2011년 ‘인도네시아 경제개발 마스터플랜(MP3EI)’을 수립해, 한국을 주요 파트너로 선정하고 이를 위해 ‘한-인니 경제협력사무국’을 설치했다. 또 양국은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CEPA)' 개시를 위한 국내 절차를 가속화하기로 의견을 같이 했으며, 2020년까지 양국 간 교역액 1,000억 달러 달성을 목표로 하는 ‘한-인니 중장기 경제협력비전’에도 합의했다. 특히 유도요노 정부는 한국의 잠수함 3척과 T-50 고등훈련기 16대 구매 및 차세대 전투기 공동 연구·개발 등 방산 협력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2017년 11월 9일 양국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서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는 데 합의했다.
대한민국은 상대적으로 좁은 영토와 한정된 자원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개발도상국부터 현재까지 경공업, 중화학공업에 이어 지식산업으로 다각적인 발전의 성과를 냈다. 이는 인도네시아 등 국가들과 외교정책을 통한 각 시대별 산업시대에 필요한 자원을 수급하고 자원 보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데일리인도네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