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화인, 보이지 않는 영토 그러나 상상되는 네트워크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장 / 칼럼니스트
상상을 초월하는 재력을 가지고 싱가포르, 홍콩, 대만 등 여러 국가를 넘나들며 금융, 항공사, 부동산, 제조업 등 다양한 사업을 하는 화인들. 2018년 개봉한 미국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Crazy Rich Asians)> 속에 비친 동남아시아 화교의 모습이다. 중국계 싱가포르인인 남자 주인공 닉이 여자친구 레이첼 추를 만나는 사진 한 장으로 순식간에 검색이 시작되면서, 홍콩에서 부동산 사업을 하는 추 가문, 대만에서 플라스틱 사업을 하는 추 가문 등이 언급되고, 싱가포르에 있는 가족과 지인들이 순식간에 소식을 알게 된다. 말로만 듣던 화인 네트워크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실제 동남아시아 화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어떤 계기로 언제 그리고 무엇을 위해 동남아로 왔을까? 그들은 어떤 사업을 하고 어떻게 연결되고 있나?
해외 거주 중국인과 관련된 용어를 살펴보면, 화교는 중국 국적을 갖고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이주국 입장에서는 일시적인 체류자이다. 화인은 다른 나라 국적으로 해외에 영구 거주하는 중국계 사람이다. 화예는 해외 거주 중국인의 자녀를 말한다. 이 글에서 화교와 화인의 의미를 혼용해서 썼다.
책 『화교 이야기』의 저자 김종호 서강대 교수는 동남아시아 화교를 남중국해 해역 공간에서 눈에 보이지 않고 실질적으로 발을 디딜 수는 없지만, 남중국해를 건너는 화인들에게 뚜렷이 상상되고 있었던 중국인의 네트워크라고 묘사한다. 네트워크의 핵심 작동 기제는 화인들이 그들끼리 ‘꽌시(關係)’와 ‘신용(信用)’을 맺고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혈연 · 지연 기반 공동체 단위의 멤버십라고 말한다.
화인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경제적 영향력과 중국과의 정치적 연계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의 비중은 4% 내외로 알려져 있지만, 자카르타 쇼핑몰과 레스토랑에서 마주치거나 텔레비전 뉴스에서 보여주는 화교 사업가의 수는 훨씬 많다. 포브스 부자 순위에서 상위에 드는 인도네시아 재벌은 대부분이 중국계 사업가들이다.
네덜란드는 자바에 강제경작제도를 도입해서 커피, 사탕수수, 담배 플랜테이션(대농장)을 만들고, 중국과 인도에서 노동력을 수입한다. 이에 따라 1880년대 중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노동이주가 급증한다. 동남아시아는 원래 다종족· 다문화 사회였는데, 여기에 유럽인과 중국인과 인도인이 더해지면서 더욱 다원화된 사회가 된다.
개인 또는 집단 단위로 이루어지는 이주는 거주지를 재조정해서 새로운 정착지를 만드는 행위이며, 송출국과 이주국 모두에 영향을 미친다. 세계적으로 이주 인구는 2억8,100만명으로 세계 인구의 3.6%를 차지하며, 이 중 노동이주는 1억6,900만 명으로 추산한다.
화인 네트워크는 이민, 무역, 송금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이민을 살표보자. 1840~1940년 기간에 중국인 약 2천만 명이 동남아시아로 내려왔고, 이는 세관 신고자 수이고 비공식 출국자도 많았으므로 실제 이주자는 더 많았을 것이고 정확한 수를 알기는 어렵다고 한다. 청나라가 1893년에 해외여행 자유화를 단행하자 이민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특히 1890년~1930년 기간에 이주한 중국인들은 동남아시아 도시에서 하층 노동자 계층을 구성했다.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중국계 이주민은 출신 지역에 따라 크게 다섯 개의 그룹으로 나뉜다. 각각 푸젠 남부지역(호키엔), 광저우를 중심으로 한 광둥지역(캔터니즈), 광둥 동북부 차오저우-샨터우 지역(줄여서 차오샨 지역. 차오저우), 푸젠과 광둥 배후지에 분산되어 거주하는 커지아(하카), 하이난섬 출신이다. 이들은 확실하게 서로를 구별했고, 방언도 서로 달랐으며, 문화와 쓰는 용어 역시 달랐다. 그들은 지역성에 기반한 정체성이 강했기에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전쟁을 벌이는 사이이기도 했다. 그들 사이에는 단지 같은 문자를 공유한다는 것과 청(淸)이라고 하는 대륙의 제국으로부터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매우 느슨한 공유 의식만이 존재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김종호 교수는 중국계 이주민들이 각 방언그룹에서 벗어나 중화민족으로서의 자각하는 계기로 20세기 초중반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발생과 쑨원(孫文)의 노력 그리고 일본의 중국과 동남아시아 침략을 꼽았다. 중국계 이주민 중 무역업자(상인)와 유통업자(상인)들은 유럽인들이 세운 항구도시에서 살면서, 금, 은, 동을 통한 교격과 동남아 산물을 유럽으로 수출하는 일을 했고, 현지에서 일하는 중국인을 위한 생필품을 수입해 유통했다. 또한 지방에서는 농민과 광부 등 생산자로 일했다. 유럽인들이 현지인을 배제하고 중국인에게 일을 시켜서 중국계 이주민들은 100년 간 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반화교 정서가 팽배해지는 요인도 됐다.
1840~1940년 기간에 중국계 이주민들이 동남아시아로 온 가장 큰 이유는 본토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이 기간에 노동이민자들의 송금액이 증가하면서 한때는 중국 무역수지의 15%를 차지하기도 했다. 노동이민자들의 송금은 지역사회에서는 현금 순환의 원천이었고, 중국 산업자본의 원천이 된다. 무엇보다 송금을 중개하던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금융산업이 발전한다.
동남아시아 노동이주는 돈과 물자만이 아니라 사상, 문화, 정보 같은 무형의 요소들도 움직이게 했다. 19~20세기 사이 100년 간 2천만 명의 이주노동자가 중국 본토 가족에게 돈과 함께 보낸 편지에는 당시 시대상이 풍부하게 담겼고, 이에 2013년에 세계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우리가 화인공동체를 주목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인도네시아에 온 한국계 이주자이고, 다른 한편으론 한국에서 외국인 이주자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교들을 살펴보면 이주된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동화되기도 하고 끝까지 이질적으로 남는 이도 있다.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도 현지화 또는 현지사회에 대한 동화 정도는 천차만별이다. 앞으로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한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은 어떤 모습으로 분화할까? 한인공동체는 어떤 모습이 될까? 우리는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100년의 시간과 기회를 얻게 될까? 그럼에도 명확한 한 가지는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현지인들과 서로를 존중하며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방향성이다. [끝]
<참고자료>
*조승연의 탐구생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리뷰 2019.9.17
*김종호, 『화교 이야기』, 너머북스, 2021
*[동남아시아 네트워크] 남중국해 화인 네트워크 속 사람, 자본, 물자, 그리고 문화의 이동: 근대 화교 송금 네트워크의 형성과 이동의 구조, 김종호 교수(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2024 메가아시아지역전문가 온라인 교육과정 3강>, 2024.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