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니 수교 50주년]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짜 친구"
글: 신성철 데일리인도네시아 발행인 / 한인뉴스 논설위원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짜 친구다.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라는 영어 속담이 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혼자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이 생긴다. 곤란한 일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 일수도 있다. 국가 간 외교관계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비슷하다고 말한다.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가혹한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하게 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인도네시아는 일본이 2차대전에서 항복한지 이틀 후인 1945년 8월17일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지배했던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선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인도네시아는 300여년 간 식민통치를 했던 네덜란드에 맞서 독립전쟁을 시작해, 4년 간 수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주권을 넘겨 받았다. 1949년 12월 27일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독립을 인정한 직후인 12월 30일 대한민국 정부는 인도네시아 국가승인을 추진하며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양국은 1973년 수교한 이후 올해가 50주년을 맞는 해이다. 그동안 양국은 어려울 때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50년 우정을 넘어 진정한 미래동반자의 관계로 성숙하고 있다.
먼저 대한민국이 어려울 때 인도네시아가 손을 내밀었다. 2013년 한국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가 발행한 '6·25전쟁 시 국제사회의 대한(對韓) 물자지원 활동'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인도네시아가 6·25전쟁 기간 한국의 막대한 피해 손실 상황에서 민생안정과 전후 복구를 위해 재정을 지원했다.
인도네시아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중재자를 자처했다. 2002년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대통령은 그해 3월 28일부터 30일까지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났다. 메가와티 대통령의 방북은 오래된 북한과의 인연 때문이다. 1965년 김일성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하여 수카르노 대통령을 만났을 때 김정일을 함께 만난 바 있었다. 메가와티 대통령은 방북 후 서해 직항로를 통해 방한했으며, 3월 30일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남북관계와 한반도 및 동아시아 등 지역정세, 국제무대에서의 협력 방안 등 공동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김정일 위원장의 방한 의사 전달이 있었다.
2018년 8월 19일 붕카르노 주경기장에서 열린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이낙연 총리와 리룡남 북한 내각부총리가 나란히 앉아 전 세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남북정상회담은 성사시키지 못했지만 조코위 대통령은 아시안게임 개회식 직전 이낙연 총리와 리룡남 북한 내각부총리와 삼자 환담을 하는 등 남북한 화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또 남북공동응원단은 자카르타에서 짧은 순간이나마 강렬하고 짜릿한 한민족의 통일을 경험했다.
인도네시아의 선의에 대한민국도 화답했다. 1977년 11월 30일에는 최각규 농수산부 장관과 사르워 에디 위보워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가 양국 정부를 대표하여 쌀 대여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같은 해 10월 인도네시아 정부가 쌀을 지원하여 줄 것을 한국 정부에 긴급히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심각한 자연재해로 식량이 부족하여 정치·사회적으로 불안한 상황이었다. 한국 정부는 인도네시아의 식량부족 해소를 위해 쌀 7만 톤을 대여하기로 신속히 결정했고, 같은 해 12월에 첫 선적이 이루어졌다. 쌀을 수입하던 한국이 외국으로 쌀을 대여한 것은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는 새마을운동으로 한국의 영농기술이 획기적으로 혁신되었고, 연이은 풍작으로 주곡인 쌀이 자급선을 넘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아체주 서부 앞바다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거대한 쓰나미가 발생해 인도네시아인 20만여명이 숨지거나 실종되는 대참사가 발생한 직후, 한국 정부와 비정부단체(NGO)는 발빠르게 인도적 지원을 펼쳤고 한국 해군 보급선이 현장에 필요한 중장비를 한국에서 피해지역까지 직접 실어 날랐다. 아울러 한국 정부는 코이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를 통해 피해 지역에 병원과 학교를 지어주고, 쓰나미 예방을 위한 조기경보장치 설비와 맹그로브 숲 조성 등 복구와 피해 예방 활동을 지원했다. 앞서 1992년 9월 1일 코이카의 제1호 해외사무소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개설된 것은 한-인니 양국 우호 관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2020년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우리나라가 인도네시아에 방역물품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방호복으로 모범적인 협력을 이뤄내면서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이 ‘진정한 친구’임을 다시 확인했다. 당시 한국은 정부 차원에서 초기부터 인도네시아를 긴급 인도적 지원 우선 파트너로 선정하고, 50만달러 상당의 긴급 지원을 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여러 가지 구체적인 협력을 이뤄냈으며, 대표적인 사례로 '방호복'을 꼽을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의료용품은 수출금지 품목으로 지정됐다. 당시 주인도네시아 대사관은 인도네시아의 의료 장비가 수출금지품목으로 지정돼 '어떻게 예외를 만들까' 하는 과정에서 인도네시아가 절박하게 느끼고 있는 방호복 부족 현장을 같이 돕자는 아이디어를 내게 됐다. 인도네시아는 최일선 의료진들이 비닐 우비를 입고 환자를 이송·진료하는 등 방호복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인 봉제업체들이 생산한 방호복을 국내로 들여오는 한편, 일부는 인도네시아 의료진에게 공급하는 협력 모델을 만들었다.
1997년 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동시에 발생한 외환위기로 인도네시아 현지 한국 기업들도 위기를 맞는다.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는 정치, 경제와 사회적인 격변기를 맞으며 혼란 상황에 빠지고 현지 한인사회도 불안정한 상황에 직면한다. 특히 1998년 5월에 일어난 사태로 한인 5천여명이 비상 탈출하고 외국기업들이 철수하는 상황이었지만 대부분의 한인 기업인들은 철수하지 않고 현지 직원들과 함께 직장을 지켜냈다. 이때부터 많은 현지인들은 자신들이 어려울 때 떠나지 않고 함께한 한국인을 ‘진정한 친구’로 여긴다.
한국과 인도네시아 간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진정한 친구’로 협력한 미담은 수없이 많다. 마지막으로 결정정인 사건을 꼽자면, 1960년대 인도네시아 정부가 한국 기업에 산림개발을 허가해준 덕분에 한국 합판산업과 산업화가 꽃을 피우게 됐고, 다시 한국 기업이 인도네시아에 합판 공장을 세우면서 인도네시아도 합판산업을 키울 수 있었다. 이제 두 나라는 전투기 KF-21을 공동 개발할 만큼 신뢰 관계를 쌓아왔다. 이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협력했고, 특히 어려울 때 양국의 협력은 더 빛났다.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짜 친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