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무속과 괴담 사이(48)] 발리해협 생성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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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 사이(48)] 발리해협 생성고사

기사입력 2022.10.12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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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무속.png

 

 


11 발리해협.jpg
발리 해협

 

 

옛날옛적, 시디 만트라(Sidi Mantra)라는 높은 도력을 가진 브라흐만 계급의 도인이 살았습니다. 그는 상향 위디야(Sanghyang Widya)라고도 불리는 바타라 구루(Batara Guru)신의 축복을 받아 큰 재물과 아름다운 아내를 얻었습니다. 힌두의 바타라 구루 주신은 예전 <자바 태고의 왕 아지사카(Ajisaka)> 이야기에서 한번 등장한 적 있습니다. 혼인 후 몇 년이 지나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나자 그는 마닉 앙꺼란(Manik Angkeran)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마닉 앙꺼란은 잘생기고 영리한 청년으로 자라났지만 청소년기에 도박에 빠져 성인이 되어서도 거기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도박으로 돈을 잃으면 막무가내로 부모 소유의 물건들을 잡히며 큰소리쳤고 나중엔 빚에 쫓기면서도 부끄러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도박빚을 갚지 못해 도박장 건달들에게 치도곤을 당할 때마다 부모에게 기어와 다시 손을 벌렸으므로 시디 만트라의 집엔 돈과 재물이 남아나지 않았습니다.


시디 만트라는 다시 신들에게 기도를 올리며 아들을 위해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이런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시디 만트라야. 아궁산(Gunung Agung) 분화구에 사는 나가 바수키(Naga Besukih)에겐 그가 지키고 있는 엄청난 재물이 있다. 그에게 가서 재물을 나누어 달라고 부탁하렴.” 


나가 바수키는 ‘바수키’란 이름을 가진 용, 또는 바수키라는 곳에 사는 용을 말하는 거죠. 시디 만트라는 곧바로 아궁산으로 출발했습니다. 마침내 아궁산 분화구 가장자리에 도착한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신력(神力)이 깃든 작은 종을 꺼내 울리며 주문을 외워 나가 바수키를 부르자 그 주문에 응해 용이 분화구 속에서 서서히 기어올라왔습니다. 마치 시디 만트라가 분화구로 찾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앞에서 용트림하며 몸을 비틀자 몸통을 온통 감싼 비늘 속에서 보석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시디 만트라는 용에게 감사의 예를 표하고 보석들을 잘 주워담은 후 그곳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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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 아궁 화산 분화 (2017년 11월)

 


집에 돌아간 그는 보석들을 판 돈으로 마닉 앙꺼란이 진 빚들을 모두 갚아주고 남은 돈을 마닉에게 건네며 이제 도박생활을 청산하고 작은 가게라도 차려 장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도박벽은 그렇게 간단히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마닉은 그 길로 곧바로 도박장에 달려갔고 모두가 예상했던 것과 같이 그 많은 재물을 단번에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가 돈을 더 달라고 요구했지만 이미 남은 보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닉 앙꺼란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도박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그 보석들을 어디서 얻어 왔는지 백방으로 알아보았고 결국 어머니를 통해 아버지가 아궁산에서 보석이 든 자루를 들고 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마닉은 즉시 아궁산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역시 명색이 브라흐만이자 도인의 아들답게 주워들은 풍월은 있었으므로 보석의 출처가 범상치 않을 것임을 짐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잘 때 예의 신력이 깃든 작은 종을 함께 훔쳐왔던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아궁산에 가면 뭔가 실마리가 나올 거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궁산 정상에 도착한 그는 어떤 주문을 외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문 대신 귀청이 떨어지도록 요란하게 종을 쳐댔습니다. 그러자 나가 바수키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버지에게 직접 묻지 않았으니 당연히 용이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마닉 앙꺼란은 겁에 질리고 말았습니다. 나가 바수키는 마닉 앙꺼란의 코 앞에 거대한 머리를 들이밀고 물었습니다. 


“인간, 여기서 종을 쳐대는 이유가 무언가?” 

용의 질문에 마닉은 띄엄띄엄 자기가 원하는 바를 말했습니다. 그도 바보는 아니어서 직감적으로 이 용이 아버지에게 보석을 나누어준 존재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지혜로운 용은 마닉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겠다. 하지만 네 행실을 고치겠다는 약조를 해야 해. 도박에서 손을 끊거라. 그렇지 않으면 인과율(카르마)의 형벌이 너를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마닉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용이 몸을 털 듯 흔들자 자기 눈 앞에 쏟아져 나온 온갖 보석과 금강석에 눈이 휘둥그레졌던 것입니다. 마닉이란 인간의 깊이는 재물 앞에선 아버지의 부탁과 용의 조언을 전혀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얄팍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 순간 그의 마음 속에 더 나쁜 생각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는 더 많은 금은보화를 얻기 바랐고 보석들이 용의 비늘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 용의 몸 속에 엄청난 재물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점잖은 목소리로 조언이나 하며 몸 속에 보석들을 품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용 정도는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는 몰래 칼을 꺼낸 후 몸을 돌려, 분화구 속으로 돌아가는 나가 버수키의 꼬리를 내리쳐 잘라 들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용맹하고 강력한 용이란 족속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었습니다. 나가 버수키는 단순히 현명한 조언이나 하고 재물을 나누어 주는 유약한 종류의 용이 아니었던 겁니다. 급히 몸을 돌려 달아나는 마닉을 따라잡은 용이 그의 발을 살짝 핥자 마닉의 몸에 불이 붙어 금방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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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바수키의 꼬리를 끊는 마닉 앙꺼란

 


한편 침대 머리맡에서 마법의 종이 없어진 것을 알고 아들의 소행임을 직감한 시디 만트라가 그 뒤를 쫓아 아궁산 분화구까지 도착했을 때엔 이미 사고가 터지고 만 후였습니다. 그는 재가 되고 만 아들의 흔적을 보고 슬픔에 빠졌지만 황망함을 거두고 다시 가부좌를 튼 후 정상적인 주문으로 나가 버수키를 불러냈습니다. 그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했고 지혜로운 용은 시디 만트라의 진심과 그의 인품을 존중했습니다.


“내 꼬리를 다시 붙여주는 조건으로……!”


전장에서 적의 대군을 물리치고 사람들 병을 고치고 죽은 이도 살려내곤 하던 시디 만트라가 정작 자신의 아들을 살려내지 못하는 것처럼 거대한 도력 덩어리인 나가 바수키 역시 신에 버금가는 온갖 조화를 부릴 수 있었지만 자신의 잘린 꼬리를 스스로 붙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시디 만트라가 아들의 재가 남은 곳에서 용의 꼬리를 가져와 감쪽같이 붙여주자 나가 바수키 역시 마닉 앙꺼란을 부활시켜 주었습니다. 시디 만트라는 어리둥절해하는 아들의 머리를 눌러 용 앞에 조아리도록 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

“내가 네 응석을 너무 받아주었기 때문이겠지. 이제 넌 더 이상 나와 같은 집에, 같은 장소에 살 수 없다.”


분화구에서 내려온 시디 만트라는 아들에게 그렇게 말하며 순식간에 아들의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고 그가 있던 자리에서 물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물은 점점 더 불어나 호수가 되고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시디 만트라가 살던 곳과 아궁산 사이에 바다가 생겨 더 이상 서로 오갈 수 없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자바섬 동단과 발리섬 사이에 위치한 발리해협입니다. 예전엔 자바섬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던 발리가 이 사건으로 인해 섬이 되어 떨어져 나가고 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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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학적으로 발리섬은 2,300만 년 전 자바섬 동쪽 수중화산 활동을 통해 형성된 것이라 합니다. 바다속에서 분출된 마그마가 굳어 발리섬을 만들었지만 당시엔 자바에 연결되어 있다가 후속 화산작용으로 인해 결국 섬으로 분리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시디 만트라와 나가 바수키의 전설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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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해협 고사 아트 모음



여기 등장하는 아궁산은 2017년 11월 21일에 분화해 화산재 기둥이 3,800미터 상공까지 솟아올랐고 당시 관광객들이 발리를 탈출하며 아비규환을 겪게 했던 화산입니다. 문재인 정부 초기였던 당시 한국도 대사관 팀이 발리에서 한국인 관광객들을 소개하고 특별기를 수라바야로 보내 발리를 탈출한 우리 국민들을 귀국시키는 특별 작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발리 힌두교도들은 이곳 아궁산에 신들의 궁전이 있다고 믿고 신성시하고 있습니다. 산자락에는 버사키 사원(Puta Besakih)이 있는데 1963년 분화로 인해 흘러내린 용암을 간신히 피하기도 했습니다. 사원 이름이 나가 바수키의 이름과 비슷한 것은 아마 같은 어원에서 변질된 것이라 보입니다. 아궁산과 버사키 사원은 마자빠힛 왕국 유민들이 처음 발리로 넘어왔을 때 유민사회를 이룬 첫 번째 장소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힌두불교왕국 마자빠힛의 전승을 담은 전설들이 이 지역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이겠죠.


2017년 아궁화산 분화 당시 나가 바수키가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그 사이 정말 용이 되어 이미 승천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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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산 산자락의 뿌라 버사키 사원

 


 

♣배동선 작가는 인도네시아의 동포 향토작가. 현지 역사, 문화에 주목하며 저서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와 번역서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공동번역서 <막스 하벨라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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