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무속과 괴담 사이(38)] 향기로운 물, 반유왕이(Banyuwangi)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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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 사이(38)] 향기로운 물, 반유왕이(Banyuwangi)의 기원

기사입력 2022.05.24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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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 사이 도입.png


반유왕이 지도.jpg
반유왕이군의 군청소재지 반유왕이

 


옛날 자바섬 동쪽 끝자락에 한 왕국이 있었습니다. 그곳의 왕세자 라덴 반뜨랑(Raden Banterang)은 전장에서는 호랑이처럼 용맹한 장수였고 평상시엔 사냥에 빠져 사는 천상 호걸 한량이었습니다.


어느 날 라덴 반뜨랑 왕자가 여느 때처럼 시종들을 거느리고 사냥을 나갔는데 숲 속에서 사슴 한 마리가 일행 앞을 빠르게 지나가자 급히 그 뒤를 쫓다가 일행과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나무와 덤불을 헤치며 흔적을 쫓았지만 결국 사슴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지친 왕자가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길을 찾던 중 숲속에서 만난 개울물이 너무나도 맑고 깨끗해 그 물을 마시니 모든 피로가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그 개울은 꽤 폭이 넓고 깊은 연못 같은 곳을 지나 하류로 흐르면서 여러 지류들과 합쳐져 도성 근처를 지나는 강의 상류였습니다. 그곳에서 개울 건너에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본 왕자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깊은 숲 속에 선녀 같은 미모의 여인이 있다면 절대 사람일 리 없으니 자신을 홀리려 나타난 정령이나 귀신이 둔갑한 모습일 터였으니까요.


“깊은 숲 속에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니? 정말 사람일까? 아니면 숲 속에 사는 귀신일까?” 

“저는 사람이에요” 

라덴 반뜨랑이 혼자 중얼거리는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여인의 대답엔 웃음기가 묻어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라덴 반뜨랑이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하자 여인도 화답했습니다.


“저는 끌룬꿍 왕국(kerajaan Klungkung)에서 온 수라티(Surati)라고 합니다. 저희 나라가 적국의 침탈을 당해 도망치다 보니 이곳 숲속까지 들어오게 되었어요. 부왕께서는 도성을 지키다가 전사하셨다고 들었어요.”


여인의 말에 라덴 반뜨랑은 놀라움과 연민을 감추지 못했고 공주가 더 이상 고통받지 않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 솟았습니다. 그는 공주를 왕궁으로 데려가 시종을 붙이고 좋은 옷과 음식을 주며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한 가지 진실에 대한 타협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끌룽꿍 왕국을 무너뜨린 나라가 바로 라덴 반뜨랑 왕자의 왕국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수라티 공주는 뒤얽힌 운명에 눈물을 흘렸지만 자신을 도우려는 라덴 반뜨랑 왕자의 진심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마음을 추스른 수라티 공주는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왕자의 곁에 계속 머물기로 했고 얼마 후 그의 청혼을 받아들여 왕자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라덴 반뜨랑 왕자를 사랑했습니다. 고국을 멸망시킨 나라의 왕자비가 되었다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지만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왕자에 대해 진심이었고 깊이 존경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가지, 라덴 반뜨랑 왕자가 아직 털어놓지 않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언제까지나 묻혀 있을 것만 같은 그 비밀은 예기치 않은 사건을 겪으며 드러나게 됩니다.


어느 날 백성들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수라티 공주가 변복을 하고 궁밖으로 나와 장터를 거닐며 장신구들을 보며 있을 때 누더기를 입은 한 남자가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랐는데 목소리가 낯익어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 누더기 거지는 자기 친오빠인 끌룽꿍 왕국의 루빡사(Rupaksa) 왕자가 변장한 모습이었습니다. 높은 도력을 가진 오빠가 치열한 전란에서 혼자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루빡사 왕자는 동생 손을 잡고 인적 없는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재회의 반가움이 채 가시기도 전, 오빠는 왕궁까지 쳐들어와 부왕을 죽인 사람이 바로 라덴 반뜨랑 왕자라는 사실을 수라티 공주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수라티의 남편이 부왕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은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동생에게 힘을 합쳐 라덴 반뜨랑 왕자에게 복수하자고 했습니다.


“너도 그러기 위해 수모를 무릅쓰고 원수의 아내가 되어 환심을 산 것이 아니냐? 이제 때가 되었다. 네가 돕는다면 부왕의 원수, 우리 왕국을 멸망시킨 원흉 라덴 반뜨랑을 반드시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수라티 공주는 오빠의 말에 당황했습니다. 자신이 라덴 반뜨랑 왕자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은 그때 숲속에서부터 은혜를 입었고 그가 자신에게 품은 사랑과 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라덴 반뜨랑 왕자가 직접 부왕을 죽였다는 사실을 숨긴 것은 충격적이었고 그로 인해 마음이 흔들린 것도 사실이지만 그녀는 원수를 원수로 갚고 싶지 않았습니다.


공주는 그간의 이야기를 오빠에게 들려주며 암살계획을 도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진심은 오빠 루빡사 왕자의 화를 돋울 뿐이었습니다. 


“너의 그 알량한 사랑이 부왕의 원수를 갚는 것보다 더 중요하단 말이냐? 정히 그렇다면 넌 이제 다시는 번복할 수 없는 결정을 해야 해. 나와 함께 부왕의 복수를 하겠느냐? 아니면 반역자가 되어 라덴 빤뜨랑 곁에서 내 복수의 칼을 함께 받겠느냐?”


루빡사가 그렇게까지 위협했지만 수라티 공주는 끝내 자신의 남편을 지키고 싶었고 오빠에게 복수를 포기해 달라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어쨌든 끌룽꿍 왕국은 이미 멸망해 버렸고 자신이 오빠의 복수를 도와 라덴 반뜨랑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끌룽꿍 왕국의 유민들이 그로 인해 더욱 고통받게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만류에 루빡사는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복수를 종용하는 대신 끌룽꿍 왕국의 전통문양이 들어간 머리끈을 동생에게 내밀었습니다. “아까 장신구를 보고 있더구나. 이건 어차피 너에게 주려고 가져온 거다. 고향의 문양이 너도 그리웠을 거야. 하지만 저 문양을 보면 네 남편이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니 평소엔 네 침상 밑에 숨겨두렴.”


수라티 공주는 오빠의 마음이 누그러진 것이라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그 머리끈을 받아 들었습니다. 하지만 머리끈이란 머리를 치장하는 것인데 그걸 왜 침상 밑에 넣어두라는 것일까요? 수라티 공주는 자신이 오빠를 만났다는 사실도, 남편이 부왕을 죽인 장본인임을 알았다는 것도 라덴 반뜨랑 왕자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라덴 반뜨랑 왕자가 이번에도 숲 속에서 사냥감을 쫓다가 또 다시 혼자 떨어졌을 때 눈 앞에 누더기를 입은 남자가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왕자는 자객이라 생각하고 급히 칼을 꺼내 들었지만 누더기 남자는 덤벼들지 않고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라덴 반뜨랑 왕자님! 당신의 아내가 당신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왕자비님 침상 밑 어딘가엔 숨겨놓은 끌룽꿍 왕국의 머리끈이 있습니다. 그것은 왕자비께서 나를 불러 당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할 때 내가 끌룽꿍 출신임을 증명하기 위해 왕자비께 드린 것입니다.” 


이 말뿐이었다면 왕자가 누더기 남자의 말을 믿을 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더기 남자는 마치 마술처럼 눈앞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라덴 반뜨랑은 이 신비로운 능력을 지닌 남자가 정말 출중한 자객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누더기 남자가 한 말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더욱이 누더기 남자가 사라지기 직전 남긴 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당신이 숲속에서 왕자비를 만난 게 과연 우연이겠습니까?”

그 말이 라덴 반뜨랑 왕자의 마음 속 의심의 불을 지폈습니다. 


왕궁에 도착한 왕자는 쳐들어가듯 곧바로 아내의 침실로 향했습니다. 그녀의 침상 밑에는 누더기 남자가 말한 것처럼 끌룽꿍 왕국 전통 문양이 들어간 머리끈이 정말로 있었습니다.


반유왕이 고사 아트 모음.jpg
반유왕이 고사 아트 모음

 


“당신 침상에서 이 머리끈이 나왔소! 이걸 준 사람에게 날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니! 어떻게 이렇게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 있소?” 

라덴 반뜨랑은 아내에게 큰 소리로 화를 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도 그건 누명이에요. 저는 당신을 해칠 마음이 추호도 없어요. 그런데 당신을 죽여달라고 사주했다니요!” 

수라티 공주는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라덴 반뜨랑 왕자는 자신이 한때 구원했던 수라티 공주가 이제 자신에게 더없이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한번 품은 마음 속 의심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그는 아내가 자신을 해치기 전 자신이 먼저 아내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라덴 반뜨랑은 수긍한 척 일단 물러섰다가 며칠 후 그간 의심 때문에 어색해진 사이를 풀겠다고 사과하며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자면서 아내를 숲속으로 데려갔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숲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라티 공주가 한때 살았던 숲속 오두막을 지나 개울이 흘러 들어 만든 연못에 도달했습니다. 물은 연못을 빠져나와 곧 급류를 타고 계곡을 흘러 한 시간쯤 후 도성을 지나게 되죠.


라덴 반뜨랑 왕자는 거기서 자신의 속내를 유감없이 드러냈습니다. 누더기 사내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며 아내에게 진실을 말하라며 몰아붙인 것입니다. 그 기세가 범상치 않았으므로 수라티 공주는 자신이 살아서 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간단히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남자는 제 친오빠에요. 오빠가 준 머리끈이 이런 음모에 사용될 줄은 몰랐어요.” 

그녀도 누더기 남자, 즉 자기 오빠를 만났던 일을 모두 애기하며 최선을 다해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라덴 반뜨랑의 귀에는 듣고 싶은 말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역시, 그 놈이 당신 오빠였군! 남매가 짜고 나를 죽이려 했구나!”

“당신은 제 남편입니다. 당신의 진심을 알려주세요. 당신을 위해서라는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 제 오빠를 만났던 이야기는 한 점 거짓없는 사실입니다. 당신을 죽이려는 것은 제가 아니라 제 오빠의 뜻이었어요. 하지만 난 도울 수 없다고 거절했어요.” 

하지만 이미 굳어버린 라덴 반뜨랑의 마음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어요. 수리티 공주도 무섭게 굳은 남편의 표정에서 그가 자신을 전혀 믿지 않고 있음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녀에겐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단 한 가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강의 정령이 내 마음을 당신에게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이 강물이 청명해지고 향기로워지면 당신의 아내가 결백했다는 것을 믿어 주세요. 하지만 만약 물이 흐려지고 악취가 풍긴다면 그건 제가 정말 죄를 지은 거겠죠!”


라덴 반뜨랑 왕자는 그저 아내가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허리춤에 찬 끄리스 단검을 뽑아 들었습니다. 후환을 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전 끌룽꿍 왕국의 궁전에서 왕의 심장을 같은 끄리스로 찌르던 순간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그 당시에도 끌룽꿍 왕실의 씨를 말려 후환을 없애려 했었죠. 이제서야 그 초심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라덴 반뜨랑 왕자의 눈빛이 광기에 젖어 번득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미처 찌르기도 전 수라티 공주가 먼저 연못에 몸을 던졌고 곧 깊은 연못바닥으로 가라앉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라덴 반뜨랑 왕자는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는데 곧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연못에서 감미로운 향기가 올라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향기는 곧 개울 전체를 뒤덮었고 연못의 물이 하류로 흐르면서 도성 앞을 기나는 강에서도 사람들은 그 신비로운 향기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라덴 반뜨랑은 아내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기억하며 몸을 떨었습니다.

 

“강물에서 향기가 피어오르다니! 아내는 정말 결백했단 말인가!” 


그는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아내 수라티 공주의 죽음을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정작 가장 믿어야 했던 아내를 믿지 않고 어리석은 확신에 사로잡혀 남의 말을 믿어버린 라덴 반뜨랑 왕자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도 그곳을 흐르는 강물에서는 향기가 사라지지 않아 사람들은 그곳을 반유왕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반유(banyu)란 물, 왕이(wangi)란 향기를 뜻하는 말이죠. 즉 ‘향기로운 물’이란 반유왕이의 지역명은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반유왕이 고사.jpg
반유왕이 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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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에서 이곳 저곳 돌아다니다 보면 이상한 지명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서부 깔리만탄 주도 뽄띠아낙(Pontianak)은 ‘처녀귀신’이란 뜻입니다. 이상하죠? 동부 깔리만탄의 발릭빠빤(Balikpapan)은 ‘뒤집어진 널빤지’라는 뜻이고요. 중부자바 살라띠가(Salatiga)는 ‘세 개의 실수’로 해석할 수 있고 자카르타에서 반둥 가는 길에 지나게 되는 르마아방(Lemahabang)이란 곳은 ‘힘없는 형’ 정도의 의미입니다. 해당 지역에 저런 이름이 붙은 배경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도시이름들의 유래를 조사해 보는 것도 꽤 재미있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이러한 이야기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여러 전설과 민화들이 겹치기도 합니다. 오늘 소개한 반유왕이의 유래 역시 쁘라부 술라끄로모(Prabu Sulalromo) 왕이 다스리던 시기의 스리 딴중(Sri Tanjung)의 에피소드가 대신 차용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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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라부 술라끄로모는 유능한 재상 빠띠 시도뼥소(Patih Sidopekso)의 보좌를 받았는데 재상의 아름다운 아내 스리 딴중을 보고 한눈에 반해 나중엔 나쁜 마음을 먹게 됩니다. 그래서 쁘라부는 재상에게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임무를 주어 외국으로 보냅니다. 외국 국왕의 손에 목이 잘리기 쉬운 그런 무리한 임무 말입니다. 그건 옛날 이스라엘의 다윗왕이 유부녀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군대 장수인 우리야 장군을 사지에 몰아넣어 적군에게 죽임을 당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작전이었죠.

하지만 재상은 모든 수완과 지혜를 발휘해 위기를 넘기고 심지어 그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 냅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한 채 많은 시간을 외국에서 보내야 했죠. 그 사이 쁘라부는 줄기차게 선물공세를 펼치며 스리 딴중을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 나중엔 남편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란 쁘라부의 악의에 찬 악담까지 듣고서도 마음을 굳게 먹고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왕의 의도와는 달리 어느 날 재상 빠띠 시도뻭소가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금의환향했는데 쁘라부는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재상을 크게 환대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하죠.

“재상의 부인이 그동안 많이 외로웠던 모양이오. 내가 마음을 써 이런저런 선물을 보내 위로하려 했는데 그걸 잘못 오해해 궁까지 찾아와 날 유혹하려 했지 뭐요? 아마 남편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나 보오. 부인을 너무 탓하지 마시오. 아내를 너무 오래 홀로 둔 탓이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재상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상태로 집에 돌아가 아내를 만났습니다.


그는 다짜고짜 아내를 도성 앞을 흐르는 강가로 끌고 가 죽이려 했습니다. 아직도 명예살인이 횡행하던 시대였습니다.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남편을 위해 정조를 지켰는데 오히려 이제 남편의 손에 죽게 된 스리 딴중은 왕국과 쁘라부와 남편에게 환멸을 느끼며 살려 달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회한에 가득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죽어 시신이 썩어 물에서 악취가 올라온다면 내가 죽을 죄를 지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강에서 향기가 피어오른다면 그건 필시 내가 결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말에도 아랑곳없이 삐띠 시도뻭소는 아내 스리 딴중의 가슴에 단검을 찔러 넣었고 그녀는 그대로 물 속으로 떨어져 가라앉았습니다. 강물은 늘 누런 흙탕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녀의 시신을 강바닥에 품게 된 강물은 다음날부터 점점 맑아졌고 은은한 향기가 물 속에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 의아해했지만 재상만은 아내 스리 딴중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며 자신이 왕에게 속았다는 것과 아내가 결백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늦은 후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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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거의 전역에 흑마술 전승이 발견되지만 반유왕이는 특히 산뗏 저주술로 유명합니다. 마치 찌레본과 인드라마유가 상대방의 마음에 강제로 상사병을 심는 뻴렛주술(ilmu pelet)로 특별히 유명한 것처럼요. 그래서 1998년 자카르타 폭동과 수하르토 하야로 시작된 전국적인 사회혼란 상황 속에서 닌자 복장을 하고 반유왕이 지역 이슬람 지도자인 끼아이(Kyai)와 울라마(Ulama)를 공격하던 이들이 두꾼들이란 소문이 나자 흑마술사들 알려진 100여명이 현지에서 린치를 당해 살해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소개한 두 개의 전설은 반유왕이의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강물에 향기를 불어넣은 수라티 공주나 스리 딴중 부인은 반유왕이에선 일반인조차 스스로의 결백과 목숨을 제물로 거대한 마력을 불러올 수 있음을 역설합니다. 또한 이들의 에피소드는 오직 죽음으로만 결백을 증명할 수 있었던 당시 여인들의 현실과 좌절을 투영하면서도 그것을 저주나 복수 대신 모두를 감복시킨 향기로 승화시킨 고귀한 여성들의 우월한 양식과 결기를 보여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끝)


반유왕이 마지막 그림.jpg



♣배동선 작가는 인도네시아의 동포 향토작가. 현지 역사, 문화에 주목하며 저서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와 번역서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공동번역서 <막스 하벨라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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