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이 좋을 때
황현중
구석이 좋을 때가 있다
고단한 하루가
모두 물러나고
조용히
구석에 등을 기대며
두 발을 뻗으면
이제 좀 살 것만 같은
별을 기다리는 작은
꽃 한 송이 될 것만 같은
현대시 기획선 066 『구석이 좋을 때』 한국문연, 2022
“구석이 좋을 때가 있다//고단한 하루가/모두 물러나고/조용히/구석에 등을 기대며/두 발을 뻗으면//이제 좀 살 것만 같은//별을 기다리는 작은/꽃 한 송이 될 것만 같은”
오늘 오랜 벗을 만나, 우연히 대구에 있는 성모당聖母堂을 방문하고, 성직자 묘역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 라틴어 경구警句 하나와 맞닥뜨렸습니다.
‘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나이를 먹어서였을까요. 결코 가슴이 서늘해지진 않았습니다. 어쩌면 30년 가까이 철학, 특히 실존주의를 가르치다 보니 당연히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연히’라는 사건. 이것은 높이 계신 당신의 계시인지,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이 닿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제는 네가, 오늘 아니면 내일은 내가’ 만나게 될 일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고단한 하루’를 벗어나 ‘이제 좀 살 것만 같은’ 한 뼘의 여지餘地. 이윽고 ‘별을 기다리는 작은’ 생명이 마주하게 될 칠흑 같은 밤. 그리고 적요寂寥를 생각합니다.
모든 생명에게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Jan Garbarek과 The Hilliard Ensemble의 ‘Parce mihi, Domine’입니다.
김상균 약력
김상균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부산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5년 <가락>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자작나무, 눈, 프로스트>와 <깊은 기억> 등이 있다. 대학 강사와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교감으로 퇴임하였다. 다수의 사진전을 개최한 바 있는 사진작가이며, 일찍부터 영화와 음악에 대한 시와 글을 써온 예술 애호가이자, 70년대 후반부터 배낭여행을 해온 여행 전문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