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신성철] “시대를 앞서간 여성 허난설헌과 까르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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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철] “시대를 앞서간 여성 허난설헌과 까르띠니”

기사입력 2022.04.25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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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여성 허난설헌과 까르띠니”

신성철 데일리인도네시아 대표 / 한인뉴스 논설위원


조선의 허난설헌(許蘭雪軒)과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까르띠니(Raden Adjeng Kartini). 두 사람은 유난히 공통점이 많다. 소녀들은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지만 전근대적인 극심한 성차별 사회에서 살았다. 두 여인은 천재적인 글쓰기를 통해 시대에 대한 저항정신을 보여주었으나, 출산 후유증으로 20대에 요절한다.


난설헌까르띠니.jpg
허난설헌(왼쪽)과 까르띠니 [위키피디아]

 

 

조선 중기인 1563년 강릉에 부유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허난설헌의 본명은 허초희이고, 호는 난설헌이다. 당시 여성들은 이름이 없었고 기생들에게나 이름을 지어주었다. 기생의 이름은 노리개감으로 불리워지기 위해 붙여졌을 뿐이다. 강릉초당두부로 잘 알려져 있는 ‘초당’은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의 호이다. 천재성을 갖고 태어난 어린 초희. 여자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않은 시대였지만, 아버지 허엽과 오빠 허봉은 초희의 재능을 아끼고 존중했으며, 어린 소녀는 어깨너머로 일찍이 글을 배웠다. 당대의 손꼽히는 시인이었지만 서자로 출세를 못한 이달에게 한시를 배웠고, 여덟 살에 '백옥루 상량문'을 지으며 놀라운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4월 21일은 인도네시아 국경일 ‘까르띠니의 날’(Hari Kartini). 까르띠니는 네덜란드 식민통치 시기인 1879년 4월 21일 중부자바 즈빠라(Jepara) 지역에서 태어났다. 당시 수마트라 북부 아쩨 지역에서 네덜란드 식민정부와 맞서 아쩨 독립전쟁(Perang Aceh)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민족이란 개념조차 자각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까르띠니의 아버지 소스로닝그랏은 네덜란드 식민정부에서 쁘리야이(priyai)라고 불리는 자바귀족 출신으로 즈빠라 지역 최고 행정관료인 부빠띠(bupati)였다. 유복하게 성장한 까르띠니는 쁘리야이 출신에게만 입학이 허용된 네덜란드 식민정부가 설립한 초등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서구 사상을 접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된다. 하지만 까르띠니는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자바 귀족의 전통에 따라 12살 이후 결혼 전까지 집에서 격리생활을 하며 책을 통해 서구세계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유창한 네덜란드어로 펜팔을 통해 세상과 교류한다.


난설헌의 삶은 결혼 전과 후가 극명하게 대비된다. 딸도 귀한 존재로 존중해줬던 집안에서 자라나 자신의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하던 결혼 전 초희의 삶은 탄탄대로를 걷는 듯 했다. 하지만 열다섯에 안동 김씨 가문의 김성립과 혼인하며 그의 삶은 곤두박질친다. 조선의 유교적 제도 하에서 시어머니와의 갈등과 난설헌의 재능에 열등감을 느낀 남편과의 불화,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와 오빠의 객사와 어린 딸과 아들마저 먼저 떠나보내는 등 삶의 고통을 온몸으로 끌어 안아야 했다. 


네덜란드어가 유창했던 까르띠니는 격리생활을 하면서 네덜란드어로 된 책을 읽고 네덜란드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 식민정부 윤리정책 책임자인 아벤다논(J.H. Abendanon) 등 네덜란드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 까르띠니는 조요디닝그랏 중부자바 렘방 지역 부빠띠의 정실부인이 아닌 4번째 부인으로 청혼이 들어왔고 결사 반대했으나 결국 결혼한다. 결혼 후 진보 성향의 남편의 후원으로 여학교 설립계획을 추진한다. 하지만 스물다섯살의 젊은 나이에 첫 아이를 낳고 출산 후유증으로 요절한다. 


시대의 굴곡을 온몸으로 감내하며 찬란한 시어로 스스로를 일으킨 여인 난살헌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아름다운 한시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스물일곱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난설헌은 조선의 여류시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조선시대의 이단아로 홍길동전의 작가이며 난설헌의 동생 허균은 누이의 뛰어난 글을 후세에 전하고자 자신이 외우고 있던 난설헌의 시편들을 모아 <난설헌집>을 엮었다. 이 시집은 명나라에서 더욱 알려져 난설헌의 시집이 출간되고, 북경대학의 교제로 사용될 정도로 중국에 더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도 그 시집이 간행돼 인기를 누렸다고 하니 가히 16세기의 한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까르띠니 사후에 친자매와 네덜란드 고위층들의 후원으로 1911년 까르띠니의 편지를 정리한 서한집 ‘어둠에서 빛으로(Out of Darkness to Light)’가 발간됐다. 네덜란드에서 5쇄를 찍었으며, 영어판도 발간돼 당시 인기를 방증해주고 있다. 이어 까르띠니재단이 설립돼 여학교가 속속 문을 열면서 까르띠니는 암울했던 네덜란드 강점 시기에 인도네시아 여성 운동의 선구자로 다시 태어난다.


확인된 210편의 난설헌의 한시는 단지 여성적인 감수성만이 아니라, 남성이 쓴 시와 같은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조선의 하층민의 삶과 애환을 그린 상당수 시편들이 난설헌의 사회적 관심과 인간애를 드러낸다. 인류의 보편적 정서를 담아내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시대를 뛰어넘는 개혁사상을 글로 표현했으나, 시대와 정치적 상황의 한계로 소리 없이 묻혔다. 반면 까르띠니의 생일인 매년 4월 21일이 되면 인도네시아 전역의 학교와 기관에서 여성운동의 선구자이자 교육운동가인 까르띠니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행사가 열린다. 1964년 수카르노 대통령은 까르띠니를 국가독립영웅으로 추대하고, 까르띠니의 생일을 국경일로 확정했다. 시대를 앞섰던 여인들은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들의 고귀한 생각을 시와 편지로 남겼다. 그리고 그들은 현대의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꿈을 꾸나요? 그 꿈을 어떻게 표현하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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