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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를 맞고 있는 수도(水島) 쟈바
양승윤 한국외대 명예교수 (동남아학)
[편집자주] 이 사회문화 칼럼은 양승윤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10년 전에 쓴 글입니다. 최근 자카르타 홍수사태를 맞아 다시 읽어보았는데, 우기와 관련해 많은 지식과 정보가 있어 다시 싣습니다.
인도네시아는 17,508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구성된 세계 최대의 도서국가(島嶼國家)로 192만㎢ 의 국토가 동남아의 적도를 중심으로 동서로 5,200㎞ 남북으로 2,000㎞에 걸쳐서 넓고 길게 분포되어 있다. 육지를 내해(內海)와 합치면 이 나라는 약 800만㎢의 영토를 가진 셈이 된다. 이렇듯 광대(廣大)한 국토는 당연히 다양한 열대성 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비가 많이 내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뭄이 계속되면 농작물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식수(食水)부족으로 비상사태가 선포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광범위한 밀림지역의 산불로 짙은 연무(煙霧)가 발생하여 이웃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와 외교적 마찰을 빚기도 한다.
우리가 예로부터 알고 지내온 겨울철 삼한사온(三寒四溫) 현상이나 인도네시아의 건기(乾期)와 우기(雨期)의 명확한 구분이 지구의 온난화(溫暖化)로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에게 여전히 네 계절의 구분이 있고 인도네시아에는 우기와 건기가 있다.
인도네시아의 우기는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이고, 건기는 4월부터 9월까지이다. 건기에도 물론 특정 지역에는 폭우가 쏟아지기도 하고, 우기라고 해도 강우량이 전 군도에 걸쳐 일정한 것은 아니다. 같은 섬에서조차 내륙과 해안과 이웃 섬 사이에도 강우량은 큰 편차(偏差)를 나타낸다. 이 나라 전체의 연평균 강우량은 1,020mm이지만, 수마트라의 빠당(Padang)이나 쟈카르타 인근의 보고르(Bogor)는 4,000mm를 상회한다. 12월부터 1월 사이에는 호우(豪雨)가 집중적으로 쏟아지는데, 강력한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여 관광객들을 놀라게 한다.
2002년 1월 말께 쟈카르타 인근에는 정말로 많은 비가 내렸다. 그곳에 오래 산 사람들의 설명으로 예년에 비해서 두 배 이상이었다고 했다. 이로 인해서 쟈카르타는 도시전체의 80%가 침수되었다. 그 원인은 뭐니뭐니해도 쟈바가 원래부터 물과 인연이 깊은 도서로서 스마랑(Semarang)이나 수라바야(Surabaya) 같은 북부 해안의 항구도시처럼 쟈카르타도 해발(海拔) 표고(標高)가 1m에 지나지 않아 해수면 높이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가 많이 오면 빗물이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만조(滿潮)가 되면 오히려 바닷물이 내륙으로 역류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60년대 말부터 밀림개발이 경제개발정책의 일환으로 무분별하고 무계획하게 이루어져서 남벌(濫伐)로 인한 빗물의 저장 기능이 급격하게 저하된 것도 주요 원인으로 들고 있다.
7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된 인구의 도시집중도 대도시를 홍수의 사각지대로 만들었다. 도시빈민들은 대부분이 무작정 도시로 나온 시골 사람들로 집이 있을 리 없고, 이들은 누구나 손쉽게 도시를 관통하는 강가나 하천 변에 야자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허름한 판잣집을 짓는다. 이들의 생활 쓰레기는 하나같이 강물에 던져져서 하류로 떠내려보낸다. 장마가 시작되어 물이 붓기 시작하면 각종 쓰레기들이 한꺼번에 몰려 떠내려 오고 강 위에 세운 나무 기둥에 걸리게 된다. 저수지까지 흘러간 물도 수문(水門)을 막아버린 쓰레기 더미로 인해서 주택가로 범람하게 된다. 도시도 급격히 비대화되었으므로 상수시설에 비해서 하수시설은 당연하게 신경 쓰지 못하였으므로 웬만한 비에도 도로 곳곳에서 하수가 솟구쳐서 도로나 주택가를 덮친다.
인도네시아 군도는 화산 폭발로 생성되었다. 오늘날 100개 이상의 활화산이 이곳에 산재되어 있음이 그 증거이다. 화산지대는 대체로 양질의 토양을 형성하므로 농업에 적합하고 다양한 지하자원을 함유하게 되지만, 무른 화산토(火山土)는 당연히 단단한 지반(地盤)을 형성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나라는 국가산업의 기초가 되는 고속도로와 전국을 연결하는 철도망이나 발전시설 등 사회기반시설 구축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므로 대형 저수지를 만들어 관개시설과 구축하고 하수로를 정비하는 등 치수(治水)사업은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또한 지상의 오폐수가 쉽게 지하로 스며들기 때문에 양질의 식수용 지하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게다가 광물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는 까닭에 장기적으로 음용(飮用)하면 간 기능이 저하되고 치아가 쉽게 상한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눈이 크고 매력적인 이곳의 여인네들은 치아를 드러내고 소리내어 웃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쟈바 지역에서 특히 많이 발견되는 크고 작은 늪지대와 연못으로 형성된 소택지(沼澤地)가 도시의 비대화에 따라 택지나 공장용지로 바뀐 것이다. 소택지는 우기에 많은 물을 끌어안고 있다가 건기에 이를 방출한다. 농업용수로 쓰임은 물론이고 적정한 수분을 공급하여 연중 녹색의 장원(莊園)을 연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소택지로 인해서 웬만한 장마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소택지가 메워지고 그 위에 공장이 들어서거나 건물이 세워졌다. 자연히 포장도로가 도시 주변을 에워싸게 된 것이다. 이제 장마비가 내리면 지하로 스며들 수도 없게 되어 주택가와 도로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2002년 2월 당시 쟈카르타에 거주하고 있던 신성철-조연숙 부부는 자신들이 목격한 엄청난 홍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늘에서는 계속 비가 내리고 땅에선 누런 황톳물이 급격하게 차 올랐습니다. 저희들의 아파트는 그래도 건축할 때 지반을 1.5m 이상 높였기 때문에 물에 잠기지 않았지만, 아파트 단지 밖으로는 어른들의 허리가 잠길 정도로 물이 찼습니다. 물론 주변도 대부분이 침수되면서 차들이 운행하지 못하여 도로는 삽시간에 주차장이 되었습니다. 아는 한 분은 평소 40분 정도 걸리는 퇴근길을 12시간이나 걸려 다음날 아침에 귀가하셨다고 했습니다. 홍수로 도로가 막히던 날 저희 집에서 세 가족이 모여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밤 10시경에 손님들이 출발했는데, 저희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에 사는 한 가족은 4시간이나 걸려서 새벽 2시에 집에 도착했고, 저희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에 사는 또 다른 가족은 아파트가 침수되어서 아예 집에 못 가고 다른 집에서 밤을 지샜다고 했습니다. TV에서는 침수된 도로 곳곳에서 승용차의 배기가스 꽁무니에 자전거 타이어를 연결해서 차의 지붕위로 연결해 주는 장면을 방영하고 있었습니다. 강물이 범람해서 도로 위로 급격하게 차 오르자 배기 가스통으로 물이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지요.”
신성철-조연숙 부부는 인도네시아에서 처음으로 자연의 두려움을 온몸으로 실감했다고 했다. 한국인들은 도시화가 잘 된 곳에서 살기 때문에 자연의 위력(威力)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인도네시아에는 아직도 교통사고나 암 등 각종 질병으로 사망하는 경우 보다 홍수나 지진 같은 천재지변으로 희생되는 사람 수가 더 많다는 보도를 읽었다고 했다.
쟈카르타에서 물난리를 겪으면서 신성철-조연숙 부부는 녹지보호와 쓰레기 처리문제 등 환경보호가 절실함을 느꼈다면서, 한국 정부도 목전(目前)의 경제성과가 아닌 장기적인 안목으로 환경문제를 보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도네시아의 심장부인 쟈바는 물의 섬이다. 서부 쟈바에 집중되어 있는 ‘찌(ci)’자(字)가 들어가는 지명은 모두 물의 도시로 보면 된다. 쟈카르타 인근의 찌비농(Cibinong), 찔레곤(Cilegon), 찌안쥬르(Cianjur), 찌마히(Cimahi) 등의 대도시가 이에 해당된다. ‘찌’는 순다(Sunda)어(語)로 물을 지칭한다. 서부 쟈바의 주도(州都)인 반둥(Bandung) 근처에도 물의 도시가 많다. 찌아미스(Ciamis)나 찌바뚜(Cibatu) 등의 도시도 물의 도시이다.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반둥 근처의 찌아뜨르(Ciater)는 노천온천(露天溫泉)으로 유명하다. 서부 쟈바의 양항(良港)으로 인도네시아 역사에 소개되는 찌레본(Cirebon)이 반둥의 북부 해안에 있는데, 물(ci)이 많은 해안의 질퍽한 땅에 키가 작은 대나무(rebon)가 많이 자생(自生)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중부와 동부 쟈바로 가면 ‘바뉴(banyu)’자가 붙은 지명들이 많다. ‘바뉴’는 쟈바(Jawa)어로 ‘물’이다. 바뉴마스(Banyumas)나 바뉴왕이(Banyuwangi)처럼 금(mas)이 많이 나고 향기(wangi)가 나는 이름다운 도시도 있지만, 바뉴는 흔히 작은 강(江)에 붙여진다. 중부 쟈바의 주도 스마랑(Semarang) 인근의 바뉴비루(Banyubiru)나 바뉴아신(Banyuasin) 또는 죡쟈카르타(Yogyakarta)의 바뉴머능(Banyumeneng) 등의 강은 그곳 사람들에 의해서 푸른(biru)강, 찝질한(asin) 강 그리고 조용한(meneng)강으로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우리는 봄은 여자의 계절이고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불렀다. 요즘 세대가 예전과 같을 수는 없지만 우리들 나름대로 한국적인 정서를 간직하고 있음은 좋은 일이다. 아무튼 사람마다 기호(嗜好)가 다르듯이 선호하는 계절이 있게 마련이다. 전체적으로 인도네시아인들은 우기와 건기 등 두 계절 중에 우기(雨期)를 택하는 것 같다.
곡류(穀類)를 제외한 밭작물과 과일이 주로 우기에 수확되기 때문이다. 싱꽁이나 고구마와 감자 등 구근(球根) 작물들이 대종을 이룬다. 대부분의 과일들은 연중 수확이 가능하지만, 두리안(durian)이나 람부딴 (rambutan), 망기스(manggis), 망가(mangga), 두꾸(duku) 같은 비싼 과일들도 주로 우기에 수확한다. 과일의 왕(king of fruits)으로 통하는 두리안은 우기의 중심인 12월에 가장 많이 소출(所出) 된다.
우기가 시작되는 10월부터 11월 사이에 기온이 갑자기 떨어진다. 그래서 새벽이 되면 사람들도 한기(寒氣)를 느끼게 된다. 기온의 변화에 민감한 닭이나 염소가 이때 대량으로 폐사(斃死)한다. 농촌지도소의 직원들은 소(sapi)와 물소(kerbau)에게 백신 접종을 하느라고 바빠진다. 어린아이와 노인들이 있는 집에서는 이때가 되면 몸을 따듯하게 하는 음식을 마련한다. 대개 죽 종류인데, 미음(bubur nasi) 이외에도 콩죽(bubur kacang hijau)이나 검은 찹쌀 죽(bubur ketan hitam)이 많이 등장한다.
겨울로 들어서서 찬바람이 나기 시작하면 길거리에 군고구마 장수가 등장하듯이, 인도네시아에서도 이 때쯤 각종 구근작물(ubi-ubian)을 불에 구워 먹는다. 우기가 시작될 무렵의 진기한 또 하나의 풍경은 물이 흐르는 곳에는 어디에나 예외 없이 작은 민물고기가 새까맣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논둑 사이의 작은 수로에서도 어른의 손가락 만한 물고기들이 많이 발견된다.
인도네시아의 호우(豪雨)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멋진 광경이기도 하다. 비가 쏟아지는 광경은 우기 때보다 건기 때의 스콜(squall)이 더 장관이다. 오후 2-3시경에 두꺼운 검은 커튼을 치듯 갑자기 어두워진다. 거리가 온통 암흑세계로 변하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만 보인다. 곧 이어 폭우가 쏟아진다. 폭우의 풍경을 묘사하기가 쉽지 않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갑자기 물을 퍼붓는다. 가로수의 작은 가지가 후두두둑 부러지기도 하고 자동차의 지붕이나 도로가 비명을 지른다. 우산을 받쳐들고 걸어가는 사람들은 거의 볼 수 없다.
한 시간쯤 지나면 해가 있는 쪽에서부터 하늘이 열리듯이 눈부신 광명이 되살아난다. 다시 태양이 나타나고 가로수의 진녹색과 붉은 계통의 지붕 색깔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5시경이 되면 아스팔트가 언제 비가 내렸느냐는 듯이 깨끗하게 마르고 기다렸다는 듯이 아름다운 무지개가 솟는다. 정신 없이 무지개를 보고 있노라면 곧 섬뜩하게 느껴질 만큼 선홍색의 태양이 저녁노을을 만드는 또 하나의 장관을 연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