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무속과 괴담 사이 (9)] 죽여도 죽지 않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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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 사이 (9)] 죽여도 죽지 않는 사람들

기사입력 2021.04.1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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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 도입.png

 

 1945년 8월 독립 직후 1949년 12월 공식적으로 주권을 되찾기까지 처절한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던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 정부군은 1948년 1월 17일 자카르타에 정박한 미군 전함 렌빌(Renville)호 함상에서 네덜란드군과 정전협정에 서명합니다. 렌빌 조약은 1946년 11월 링가자티 협정 이후 두 번째 정전협정입니다. 이로서 그 해 12월 네덜란드군이 정전협정을 깨고 인도네시아 공화국 임시 수도였던 족자를 짓쳐 들어올 때까지 1년이 채 못되는 짧은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이 시기에 수카르노-하타 정부는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공화국 내부상황을 추스르며 정비를 시작하지만 그해 9월 중부자바 소재 마디운(Madiun)에서 공산당 봉기는 공화국의 기반을 위태롭게 했습니다. 1920년대부터 공산당 거물 지도자였던 무쏘(Musso)가 소련에서 돌아오고 공화국 2대 총리를 역임했던 아미르 샤리푸딘(Amir Sjarifudin)도 인도네시아 공산당(PKI)과 인도네시아 사회당(PSI)이 주축이 된 ‘인도네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에 가담하면서 공화국은 더욱 혼란 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공산당 봉기는 많은 사상자를 내며 무자비하게 진압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군사적 허점을 주목한 네덜란드군이 정전협정을 일방적으로 깨고 공격해 오는 상황을 허락하고 맙니다.

 

 정부군이 마디운 공산봉기를 진압하던 과정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합니다.

 

께말 이드리스 장군.jpg
께말 이드리스 장군(오른쪽)

 

 훗날 예비역 육군전략사령관으로 전역한 께말 이드리스 중장은 1948년 당시 소령이었고 마디운 사태 이후 동부 및 중부자바에서 PKI 반군들을 진압하는 검은 별 부대 사령관이기도 했다. 그는 빠띠(Pati) 지역에서 PKI 반군들을 패퇴시켰고 몇몇 PKI 거물급 간부들을 포로로 잡았다. 속전속결 진행된 군사재판에서 이들 PKI 간부 4명 모두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들은 곧바로 군중들이 운집한 광정으로 끌려가 총살당할 운명이었다.

 

 께말 이드리스는 훗날 출간한 자서전 '혁명 속의 투쟁'(Bertarung Dalam Revolusi)에 등장하는 이 에피소드에서 그 PKI 간부 중 한 명이 금강불괴 주술을 가지고 있어 수차례 사격했음에도 생채기 하나 입히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몇 번이나 탄창을 갈아 끼웠고 심지어 자동화기까지 동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른 세 명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졌지만 그 PKI 간부만은 혼자 버젓이 서서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건 분명히 도검불침의 금강불괴 신체술, 즉 일무끄발(Ilmu Kebal)의 발현이었다.

 

 광장이 술렁이자 처형 부대를 이끌던 아흐마드 중위가 탄창에서 탄약을 한 발 꺼내 발 밑 흙에 몇 번 문지르더니 다시 탄창에 끼워 넣었다. “탕!” 가까이 다가간 그가 권총 방아쇠를 당기자 그 PKI 간부는 당장 머리가 터지며 고꾸러졌다. 군중들은 입이 딱 벌어졌고 그 상황을 지켜보던 중립국 감독관 호주군 장교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것은 2015년 1월 18일자 머르데카닷컴에 실린 기사입니다.

  탄약에 흙을 묻힌 것은 통상적이지 않은 방식을 거침으로써 일정 조건 아래 걸려 있는 주술을 깨는 행위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꽤 많이 있는데 8명의 경찰이 10미터 거리에서 총을 쏴도 끄떡하지 않고 칼을 휘두르며 덤비는 범인에게 한 경찰이 탄약을 오줌에 적셔 다시 장전해 사격하자 비로소 관통상을 입혔다는 2012년 12월 까스꾸스포럼 기사도 있습니다. 

 

 독립전쟁이 끝난 후에도 인도네시아는 수많은 지역반란을 겪었는데 술라웨시에서 벌어진 뻐르메스타 반란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 역사에도 관련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1958년에 2월 빠당을 중심으로 한 중부 수마트라에서 PRRI(인도네시아 공화국 혁명정부) 반란이 일어나고 같은 해 3월에는 남부 술라웨시에서 뻐르메스타 반란이 시작됩니다. 이 반란들은 자카르타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 비해 자바섬을 벗어난 지방의 발전이 크게 낙후된 것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해당 지역 군사령부가 주축이 된 이 반란에서 해당지역들이 지방세수를 중앙에 보내지 않고 직접 각 지역의 발전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것이 요구사항의 골자였습니다. 하지만 돈 없이는 국가가 성립될 수 없었으니 수까르노의 중앙정부가 진압에 들어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여기 욥 바로우(Joop Warouw)라는 걸출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미나하사의 KNIL 병사들이 네덜란드군에게 맞서게 지원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고 시마뚜빵과 나수티온 등이 국회와 대립각을 세울 때 남부 술라웨시 제7군 참모장으로서 당시 군부의 편에 서서 국회를 위협했던 가똣 수브로또 대령을 체포하면서 중앙정부에 충성했지만 PRRI-뻐르메스타 반란이 벌어지자 펜체 수무알, 알렉스 까윌라랑과 함께 뻐르메스타 운동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고 PRRI의 부총리 겸 건설부장관 자리를 맡는 등 시류를 유연하게 타며 승승장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1960년 중앙정부 진압군이 북부 술라웨시를 점령할 당시 같은 편이면서도 자신과 대립하던 얀 띰블렝의 뻐르메스타군 제999여단 제7 대대에게 그해 4월 체포되어 6개월 동안 감금되었다가 1960년 10월 15일 살해당합니다.


얀 띰블렝.jpg
뒷줄 가운데 뚱뚱한 이가 얀 띰블렝

 

 펜쩨 수무알 대령이 바로우를 구출하기 위해 얀 띰블렝과 그의 부대를 10월 8일 회합에 불러내지만 그 의도를 눈치챈 얀 띰블렝은 극렬히 저항하다가 사살당했고 그 자리에서 빠져나간 잔당들이 수무알 대령의 병력이 도달하기 전, 근거지에 감금하고 있던 와로우를 끌어내 살해했습니다. 얀 띰블렝은 금강불괴 주술이 걸린 반지부적을 사용해 소총 실탄도 그의 몸을 관통할 수 없었으므로 그를 죽일 때 특별한 방법이 동원되었다고 하며 그가 잔혹한 성품도 오랜 기간 사용한 주술의 부작용이었다는 전해집니다.

 

 이런 금강불괴술의 끝장판을 보여주는 대박 동영상이 유튜브에 있습니다. ‘고론탈로의 남자, 사격무위술’(Pria Gorontalo kebal tembak)이라는 제목으로 지금도 검색가능한 이 동영상은 2011년 트랜스뚜주(Trans7)라는 인도네시아 정규 지상파 방송 TV 뉴스의 한 꼭지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따르잔’이라는 남자는 총알을 107발씩이나 맞았지만 피 한방울도 흘리지 않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ooXv3aHeJU)

 

 뉴스 아나운서의 나래이션은 대략 이렇습니다. 술라웨시 북부 고론탈로 (Gorontalio) 지역에 살던 따르잔이 빌린 돈을 갚으라며 집에 찾아와 독촉하는 이웃과 그를 동행한 경관 한 명을 때려 살해합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이 남자에게 수차례 경고한 끝에 처음엔 팔과 다리, 나중엔 몸통을 향해 비교적 근거리에서 107발의 총알을 쏘았는데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가 사용하는 금강불괴술의 부적인 반지를 경찰이 조준사격해 깨뜨리자 따르잔은 고꾸라져 경련을 일으키다가 숨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장면이 정규 뉴스방송으로 편성돼 TV 전파를 타는 인도네시아에서 사람들이 일무끄발 금강불괴술을 믿지 않을 리 없습니다.

 

 끄발이란 기본적으로 '굳건히 지켜낸다'는 의미입니다. 병에 몸이 상하지 않는다는 다야끄발(daya kebal)은 면역력을 뜻합니다. 병장기로 몸을 상하게 할 수 없다는 의미의 일무끄발(Ilmu kebal)은 영력이나 신령한 힘을 통해 신체에 가해지는 물리적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능력 또는 그런 주술을 뜻합니다.

 

 금강불괴술은 실제로 인도네시아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특히 폭력과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경찰이나 군인, 조폭, 깡패, 소매치기, 도둑, 강도들은 물론 범죄 대상이 되기 쉬운 사업가와 정치가들까지 강불괴술에 심취해 반지나 단검 같은 성물과 부적들을 지니곤 합니다. 

 

 도검불침의 금강불괴술이 반드시 범법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인도네시아 역사와 설화에 등장하는 많은 위인들과 영웅들이 이 술법을 사용했습니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과 일본군 강점기에 증조부나 고조부 누군가가 이런 금강불괴술을 사용해 침략자들과 대적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란 인도네시아인들을 종종 만납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일본군을 피해 악어들이 징검다리를 만들어줘 깊은 강을 건넜다거나 하루 밤에 이쪽 산을 저쪽으로 옮겨 적군의 진로를 막았다는 식의 지나친 과장이 함께 등장해 신뢰도가 크게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 절대적으로 우세한 화력을 가진 침략자들과 맞서 싸웠던, 용맹스럽지만 칼 한 자루, 창 한 자루 같은 일천한 무기, 또는 쁜짝실랏 같은 맨손 무술로만 무장한 현지 영웅들에게 금강불괴술은 그들의 목숨을 담보할 최후의 보루, 즉 방탄복 같은 것이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일무끄발 시연.jpg
일무끄발 시연

 

 하지만 비단 총칼을 견뎌내는 정도를 넘어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카르타 교민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인도네시아인들이라면 대부분 잘 알고 있는 시삐뚱(Si Pitung)의 일화를 소개하며 이번 글을 마칩니다.

 

 Si Pitung은 인도네시아 현대사에 등장하는 실존인물입니다. 그는 침략자와 결탁한 부자들, 기득권층을 공격해 약탈한 것을 바타비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한때 수까르노-하타 공항을 북부 자카르타의 마룬다로 옮기려 했는데 당시 마룬다 신축공항 이름을 시삐뚱 공항으로 하려 했습니다. 그는 그만큼 사랑받는 바타비아의 로빈훗이었고 영화도 몇 편이나 나왔습니다.

 

 그는 서부 자카르타 라와벨롱 지역 출신입니다. 지금의 심뿌룩인다, 뻐르마타 히조 인근이죠. 그는 나이삔이란 스승에게서 일무끄발의 술법을 전수받았습니다. 총독부 경찰총감까지 직접 나서 부대를 움직여 그를 잡으려 했지만 총칼로 그를 해할 수 없어 매번 놓치곤 했습니다. 하지만 총독부는 끈질기게 그의 불사의 비밀을 알아내 끝내 그를 죽입니다. 당시 상황은 1893년 10월 18일자 네덜란드 동인도 신문 Hindia Orlanda지에도 실려 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시삐뚱은 사살될 당시 머리를 짧게 자른 상태였다고 합니다. 삼손이 생각나는 대목이죠. 어쩌면 그의 긴 머리칼이 일무끄발 주술의 지맛(부적)이었던 겁니다. 또다른 전승에 따르면 그의 몸을 지켜주던 부적을 누군가 탈취했기 때문에 죽음을 맞았다고도 합니다. 

 

 총독부가 군대를 동원해 빌라도 시대 예수의 무덤처럼 시삐뚱의 무덤을 지키고 바타비아 사람들의 성묘를 금지한 것은 강력한 일무끄발 능력을 가진 시삐뚱이 되살아날 것이란 민중의 믿음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사용한 금강불괴술은 일무끄발 중에서도 일무라웨론떽(Ilmu Rawe Rontek)이란 것인데 이는 흡혈귀처럼 목과 몸을 완전히 분리해 놓지 않으면 잘린 몸이 서로 붙어 마침내 주술의 시전자가 되살아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총독부 히네 경감이 금으로 만든 탄환을 사용해 그를 쏴 사살했고 그가 쓰러지자 즉시 목을 잘라 목과 몸을 각각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곳에 매장했다고 합니다. [데일리인도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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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룬다 소재 시삐뚱 생가

 

 

♣배동선 작가는 인도네시아의 동포 향토작가. 현지 역사, 문화에 주목하며 저서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와 공동번역서 <막스 하벨라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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