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
이소호
나는 나 같은 너에 대해 말한다 당신이 파 놓은 구멍마다 들어가 보는 고양이처럼 너라는 나에 대해 말한다 모자란 2월의 날들을 걸어 놓은 옷걸이 푹 삶은 하얀 양말을 신고 건너간 수화기 너머에는 내가 버려 놓은 말들이 떨고 있다 먼지 위에 쌓아 올린 일기처럼 문턱을 넘지 못한 발가락처럼 나는 나보다 멀리 가 떨고 있다
나는 당신으로부터 있다
나는 네 침대에 놓인 긴 머리카락보다 말이 없다 말을 뒤집어 우리는 뒷면을 응시한다 하루의 뒷면, 칫솔의 뒷면, 크랜베리 빵의 뒷면, 미키마우스 티셔츠의 뒷면, 그리고 섬의 뒷면 당신은 잘린 손톱처럼 외롭다 섬, 섬 나는 스위치를 내리고 불 꺼진 등대를 생각한다
민음의 시 253 『캣콜링』 민음사, 2018
“나는 나 같은 너에 대해 말한다 당신이 파 놓은 구멍마다 들어가 보는 고양이처럼 너라는 나에 대해 말한다……//나는 당신으로부터 있다//…… 섬, 섬 나는 스위치를 내리고 불 꺼진 등대를 생각한다”
이윽고 봄은 왔네요. 매화, 개나리, 서향(瑞香, 천리향), 목련에 수선화까지 활짝 피었습니다. 여전히 아쉬움마냥 벽에는 ‘모자란 2월의 날들을 걸어 놓은’ 달력이 걸려있을지라도 말입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즉 '봄은 왔지만 봄 같지가 않구나'라는 말을 많이들 쓰고 있지만, 다시 폭설이 내리고 또 한 번 한파가 닥치더라도 단연코 분명히 봄은 왔습니다. 우리를 사로잡는 근심이나 걱정거리에 자신을 가둬두지 말고, 아직은 서툰 봄일지라도 움트는 모습과 그 숨결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봄은 왔습니다.
모두가 코로나19 팬데믹을 조속히 극복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모든 생명에게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영화 피아노(The Piano, 1993)의 주제곡 ‘The Heart Asks Pleasure First’입니다.
김상균 약력
김상균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부산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5년 무크지 <가락>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자작나무, 눈, 프로스트>와 <깊은 기억> 등이 있다. 대학 강사와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교감으로 퇴임하였다. 다수의 사진전을 개최한 바 있는 사진작가이며, 일찍부터 영화와 음악에 대한 시와 글을 써온 예술 애호가이자, 70년대 후반부터 배낭여행을 해온 여행 전문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