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무속과 괴담 사이(4)]마따람 왕국의 수호여신 니로로끼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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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 사이(4)]마따람 왕국의 수호여신 니로로끼둘

기사입력 2021.02.0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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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 도입.png

 

 

니로로키둘3.jpg
니로로키둘

 

  자바섬 중남부 위치한 족자카르타에 있는 빠랑꾸수모(Parangkusumo)와 빠랑뜨리띠스(Parangtritis) 해안에는 데위 까디따 전설과 결을 조금 달리하는 니로로끼둘(Nyi Roro Kidul)의 전설들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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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는 바야흐로 훗날 마따람 왕국의 시조 권능왕 스노빠띠(Penembahan Senopati)라고 불리게 될 수따위자야 (Sutawijaya)가 빠장 왕국(Kerajaan Pajang)과 전쟁을 벌이던 16세기 후반. 거듭되는 전쟁에 지친 수따위자야가 잠시 숨을 돌리려 고향인 꼬따거데(Kota Gede)에 돌아와 남쪽 빠랑꾸수모(Parang Kumuso) 해변에서 깊은 명상에 들었습니다. 영력 강한 인물의 명상은 영적 세계에 천재지변을 일으키곤 하는데 이날 수따위자야의 명상은 그가 의도치 않았지만 남쪽 바다 마물들 세계에 뜨거운 광풍을 일으켜 가까이 있던 귀신들은 단숨에 불타 소멸해 버렸고 강한 마물들조차 명상의 힘에 떠밀리며 아우성을 쳤습니다. 해안에서 아수라장이 벌어지자 깊은 바다 속 끄라똔에 있던 니로로끼둘이 뭍으로 올라옵니다. 원래 단숨에 소동의 근원을 제거할 생각이었지만 늠름한 수따위자야의 모습에 수천 년 동안 흔들리지 않던 니로로끼둘의 마음이 순간 움직였습니다. 수천 년이라 말한 것은 이 전설속의 니로로끼둘은 데위 까디따가 아니라 고대로부터의 남쪽바다를 지켜온 불멸의 영적 존재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그녀는 평범한 인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였지만 수따위자야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영웅이여. 그대가 우리들을 핍박해 얻으려는 게 무엇인가요?”

  수따위자야 역시 니로로끼둘의 눈부신 자태에 금방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수따위자야는 명상을 멈추고 둘은 빠랑꾸수모 해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급기야 니로로끼둘은 수따위자야를 바다 속 끄라똔으로 데려가 사흘 밤낮을 함께 지내며 그의 영적 아내가 됩니다. 그녀는 빠장왕국을 무찔러 새로운 왕국 건설을 돕기로 약속하죠. 그리하여 니로로끼둘은 마따람의 수호신이자 수따위자야, 즉 스노빠티의 뒤를 잇는 역대 마따람 왕들의 영적 아내가 됩니다. 이슬람 술탄국인 마따람 왕국에 이교도 여신이 개입하는 기이한 상황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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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따람의 3대 왕 술탄 아궁(재위 1613~1645)에게 할아버지인 시조 스노빠띠(재위 1586~1601)가 니로로끼둘을 자신의 아내라 말했다는 이야기가 ‘자바땅의 역사서’(Babad Tanah Jawi)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마따람이 까르따수라 왕국으로 바뀌고 1755년 네덜란드 총독부가 개입한 기얀티 조약으로 다시 족자와 수라까르따로 쪼개진 후에도 니로로키둘은 여전히 족자 역대 술탄들과 수라까르따(솔로) 역대 수수후난들의 영적 아내로 남았습니다. 현재 족자의 끄라똔 궁전도 머리피 산과 니로로키둘의 바다 속 궁전을 잇는 선상에 지어졌다고 전설에서도 현실 근대역사 속에 니로로키둘이 차지하는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니로로끼둘이 술탄과 수수후난의 영적 아내라는 사실로 인해 훗날 누군가 그녀를 만나게 되면 그것은 그냥 초현실적 경험을 했다는 것 이상으로 제왕이 될 사람, 즉 마따람의 후계자란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를 만났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디뽀느고로 왕자는 끄라똔의 술탄들보다 더욱 압도적인 민중의 지지를 받아 자바전쟁(1825~1830)를 통해 네덜란드 세력을 자바섬에서 거의 몰아낼 뻔한 상황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끄라똔의 술탄이 아니라 니로로키둘을 만난 디뽀느고로 왕자야말로 마따람의 진정한 적통이라 믿었기 때문이죠. 

 

  이후에도 민중의 전폭적 지지를 얻거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니로로끼둘을 만났다고 스스로 소문을 내는 이들이 적지 않았고 역대 대통령들도 대체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독립전쟁 영웅이자 족자 술탄이었던 하멍꾸부워노 9세도 그의 자서전에 니로로키둘과 영적으로 조우한 경험을 기술했고 1988년 10월 3일 그가 서거했을 때 끄라똔 궁전 사환이 임종을 맞는 술탄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니로로키둘의 모습을 보았다는 기사가 무려 현지 언론 뗌뽀(Tempo) 지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이쯤 되면 니로로끼둘은 여신이나 전설이 아니라 다분히 자바 사회 저변을 아우르는 일종의 ‘현상’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족자 술탄국은 이제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사실상 술탄의 대가 끊긴 족자 끄라똔의 술탄 하멍꾸부워노 10세(앞서 9세의 아들)는 2015년 5월 5일 자신의 장녀 뻠바윤 공주(Gusti Kanjeng Ratu Pembayun)를 차기 술탄으로 삼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바아흐로 족자 술탄국 사상 첫 여성 술탄이 탄생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성 술탄이 즉위하면 니로로끼둘의 남편으로서 거행하는 대관식에 문제가 생깁니다. 술탄의 영적 아내가 아니라 이제 영적 언니가 되어야 할 상황에 처한 니로로끼둘도 바다 속 끄라똔에서 매우 난감해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족자 술탄.jpg
족자 술탄 하멩꾸부워노 10세와 구스띠 깐젱 라뚜 뻠바윤 공주

 

  한편 인도네시아의 문호 쁘라무디야 아난따 뚜르는 이 전설에 대해 냉정한 분석을 내립니다. 1988년 막사이사이상 수상연설에서 그는 술탄 아궁이 1628~1629년 사이 바따비아(현 자카르타)를 공격해 네덜란드인들을 궁지로 몰았지만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고 목적했던 북쪽해안 통상로도 얻지 못하자 마따람 궁전의 모든 문신들을 동원해 그 정신적 보상 차원에서 니로로끼둘의 전설을 창작해 그래도 남쪽 바다는 마따람의 지배하에 있음을 강조한 것이라 주장한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전설이 또 다른 전설을 낳으면서 마따람의 역대 제왕들이 바다의 여왕을 아내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녹색 옷을 금기시하는 전설의 디테일 역시 사실은 대체로 녹색 계통이었던 네덜란드군의 군복과 연관을 지으려는 문인들 노력의 산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녹색 제복의 네덜란드군을 혐오하는 니로로끼둘은 반식민주의적, 민족주의적 여신으로 민중의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쁘라무디야 아난따 뚜르의 주장과 관계없이 니로로끼둘은 자바 문화 속에 깊이 녹아 들어 있고 이를 증명하듯 남쪽 바다 여신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와 드라마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어찌 보면 전설 속, 무너져버린 육신을 험한 바다에 내던진 순결하고 나약했던 빠자자란의 공주, 그리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력한 영력으로 풍랑을 다스리고 마따람을 수호하며 신성한 녹색을 범한 이들을 파멸시키는 남쪽 바다의 여신의 극단적 대비는 15~16세기부터 시작된 외세의 침략에 속수무책이던 자바 왕국들의 현실적 무력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하고 극복하고자 했던 자바인들의 집단적 의지, 그 양면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 아닌가 감히 생각해 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직전인 1941년 미국에서 나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만화 캡틴 아메리카처럼. [데일리인도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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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로로키둘 드라마

 


♣배동선 작가는

  인도네시아의 동포 향토작가. 현지 역사, 문화에 주목하며 저서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와 공동번역서 <막스 하벨라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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