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인도네시아 한인들은 어떻게 살아왔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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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한인들은 어떻게 살아왔나(2)

“청춘 30년을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미스떠르 꼬레아”
기사입력 2019.11.29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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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크랜드.jpg▲ 파크랜드 즈빠라 공장 전경 2016. 9. 8 (즈빠라=데일리인도네시아 자료사진)
 
[편집자주] 이 글은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 편찬을 위한 사료로, 한인들이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첨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인뉴스를 비롯한 여러 한인 미디어에 게재합니다.  이 글 주제와 관련해 사진과 기록물 등 다양한 자료를 제보해주시면, 스캔 또는 사진촬영 후 돌려드리겠습니다. 한인사에는 편집을 거친 사료를 전체 분량을 고려해 일부만 사용할 계획입니다. 인도네시아 한인사의 주역인 한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바랍니다.

글: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국장, 한인사 편찬위원 

 인도네시아인들이 한국인 남자를 부르는 명칭 중 하나가 ‘미쓰떠르’(Mr.)입니다. 영어의 미스터에서 온 미스떠르는 주로 외국인 남자를 부르는 호칭으로 쓰였고, 한국사람을 ‘미스떠르 꼬레아’라고 불렀습니다. 이번 글의 주인공은 1970년대 진출한 원목회사들이 자리를 잡고, 새로이 봉제와 신발 업체들이 진출하던 시기인 1980년대 중반에 온 사람들입니다. 이 글은 인터뷰 대상자들의 요청에 따라 익명으로 씁니다. *편의를 위해 실제 성이 아닌 한국에서 가장 흔한 성씨인 김과 이를 사용하겠습니다.

 이들은 각기 다른 해에 인도네시아에 왔고 일하는 분야도 달랐지만 비슷한 시대 경험을 했습니다. 학교 졸업 후 중간관리자로 인도네시아 기업에 취업해 결혼하고 현지에서 자녀를 낳아 키웠습니다. 이들은 지금 50~60대가 되어 일부는 퇴직 후 귀국했고, 일부는 인도네시아에 남아서 기업의 중역이나 대표로 일하기도 하고 서비스와 유통 분야에서 자영업을 하기도 합니다. 이들의 자녀는 이제 20~30대가 되어 인도네시아와 한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자란 경험을 쓸 기회를 가진 사람도 있고 전혀 상관 없이 살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미스떠르 김은 한국계 원목회사에 취업해서 1985년부터 2017년까지 근무했습니다. 인도네시아 북서단 수마트라 섬에서 시작해 자카르타 본사를 거쳐 인도네시아 최동단 빠뿌아에서 근무를 마쳤습니다. 미스떠르 리는 한국계 신발회사에 취업해서 1989년부터 자카르타 서부에 위치한 위성도시 땅그랑에서 근무했고, 지금은 스마랑에서 관리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미스떠르 김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이지도 크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인도네시아에 가는 것이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 크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비행기 타고 간다고 하니 그러려니 했어요. 가족과 친구들은 제가 인도네시아에 간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어디에 가는지 몰랐어요. 인도네시아와 인도를 구별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가기 전에 외교부가 실시하는 소양교육을 받았어요. 지금도 기억 나는 건 북한에 납북되지 않게 주의하라는 것과 소매치기를 예방하기 위해 지갑을 바지 앞주머니에 넣으라는 내용입니다. 

미스떠르 김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숙했어요”
 면접 보러 서울 사무소에 갔는데 면접을 마치고 식비와 차비를 주더라고요. 신기하기도 하고 만족스럽기도 했어요. 인도네시아로 출국하던 때가 1월이었어요. 두꺼운 양복 입고 김포공항에서 대한항공편으로 홍콩에 가서 홍콩에서 가루다항공편으로 자카르타 할림공항에 내렸어요. 다른 사람들은 양복 상의를 벗으니까, 반팔이더라구요. 저만 속까지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서 비 오듯 땀을 흘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만해도 상급 직원들이 신입사원이나 사원가족들을 서울에서 인솔해서 국제선을 탔습니다. 사장이나 중역들이 신입사원의 입출국 수속을 직접 도와주면서 데리고 들어오는 일이 흔했습니다. 일부 회사는 환승하면서 밥이라도 사 먹으라며 사원가족들에게 별도로 여비를 챙겨주기도 했어요. 

미스떠리 리 “아! 상하의 나라에 왔구나”
 자카르타에 도착해 숙소에 심어진 야자수를 보니 상하의 나라에 온 느낌이 확 다가왔어요. 첫 인도네시아어 강사(?)는 숙소에서 정원을 관리하던 남자 사환이었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정원에 나가서 이것 저것 눈에 들어오는 사물을 가리키며 묻고, 그의 답을 들으며 인도네시아어 단어를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미스떠르 김 “비누를 뜻하는 '사분'이라는 단어가 경상도 사투리와 같더라구요." 
 인도네시아어를 모른다고 했더니, 숙소에 있는 직원이 인도네시아어 학습서를 주었습니다. 침대에 누워서 책을 펼쳤는데, 비누를 'sabun'이라고 한다고 써 있었습니다. 경상도 말로 비누를 사분이라고 하잖아요. 갑자기 친근감이 들면서 마음이 놓였어요. 

미스떠르 리 “5, 25, 100루피아짜리를 골고루 주며 돈을 익히라고 했습니다”  
 사무실에 출근하니, 제일 먼저 인도네시아 돈을 종류별로 주더니 익히라고 했습니다. 100루피아짜리 빨간색 도안의 지폐가 가장 큰 돈이고, 25루피아와 5루피아가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발행하지 않는 25루피아짜리가 신기했습니다. 

미스떠르 리 “직장 분위기가 한 가족 같았습니다”  
 제가 자카르타에 온 첫 날 모든 직원이 함께 저녁을 먹으며 입사를 축하해주었습니다. 진심으로 환영받는다고 느꼈어요. 당시 자카르타 사무실에는 사장님부터 갓 입사한 저까지 20여명이 근무했습니다. 당연히 친밀한 분위기였죠. 신입사원이 와도 외부 손님이 와도 지역 근무자가 출장을 나와도 모든 직원이 회식을 했습니다. 한식당에 가면 주변에 앉은 손님들이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반갑게 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미스떠르 김 “한끝 차이로 달라지는 뜻 때문에 놀림도 당했지요.” 
 현지인이 제가 인도네시아에 처음 온 걸 눈치 채고 다른 사람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저건 뭐라고 해요?”라고 묻기에 “룸뿟(rumput. 잔디)”이라고 답했고, 그게 소문 나서 한동안 놀림을 당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머리카락은 rambut(람붓)입니다. 외국인을 놀리기 좋은 또 다른 단어는 babi(돼지고기)와 bibi(아주머니), kelapa(야자)와 kepala(머리) 등이 있습니다. '끌라빠 무다'를 마시면 갈증이 가시지만 '끄빨라 무다'를 먹으면 '아이 머리'를 먹는 식인종이 됩니다.  

미스떠르 리 “수디르만은 조용하고 나무가 많은 아름다운 거리였습니다.” 
 일요일에 자카르타 수디르만 거리를 걸었는데 조용하고 나무가 많은 아름다운 거리였어요. 그때만 해도 거리에 차가 드물어서 차량 통제 같은 조치가 없어도 그냥 걸을 수 있었어요. 또 하나 기억 나는 곳은 쭉쭉 뻗은 나무들이 인상적이었던 보고르 식물원입니다. 당시에 한국에서는 그런 아름드리 나무를 보기 힘들었어요.  

미스떠르 김 “수마트라도 좋았어요. 주택과 물만 빼면”
 수마트라섬 부임지는 인도네시아에서도 오지에 속하지만 저는 매우 좋았어요. 무엇보다 비 온 뒤 상쾌함이 좋았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드물게 현지인들이 개를 많이 키웠어요. 다만 나무로 지은 집과 흙탕물은 아쉬웠어요. 전기가 안 들어와서 자가발전기를 돌렸고, 밤 10시가 되면 발전기를 꺼서 무조건 자야 했고, 일찍 자니 일찍 일어났습니다. 당시에는 에어컨도 없었고 배터리를 충전해서 돌리는 이동식 선풍기만 있었습니다. 

미스떠르 김 “준비한 말을 해도 돌아오는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관공서나 은행에 가려면 전날 현지인과 늦게까지 인도네시아어로 할 말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관공서에 가서 말을 하고 나면, 돌아오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거예요. 민망하지만 써달라고 해서 사무실에 돌아와서 현지인 직원과 해석해서 처리했습니다.  

미스떠르 리 “자카르타에 근무하면서 결혼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2~3년 정도 근무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되는 느낌이 드니 저도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가족들도 결혼을 권유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미혼인 동료들은 가족이나 회사 동료가 소개해서 배우자를 만났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도네시아를 잘 몰라서, 인도네시아에 가서 살아야 한다는 말에 만남 자체가 성사되지 않거나 만나서 거절 당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일사천리로 결혼이 진행됐습니다.

미스떠르 리 “수시로 띠뿌스를 앓았고 전화가 오면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근무하는 동안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여서 수시로 띠뿌스(열병)를 앓았습니다. 띠뿌스는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아서 면역력이 떨어지면 걸리고 재발이 많은 병입니다. 낮에 해고시킨 직원이 한밤중에 정글칼을 들고 숙소로 찾아와서 피한 적도 있고, 노사분규가 일어나서 흥분한 현지 직원들 사이에 들어가서 진정시키고 협상을 한 적도 많았습니다. 대체로 밤에 오는 전화는 뭔가 급하게 해결해 달라는 경우가 많아서, 밤에 전화가 오면 가슴이 두근거렸고, 심지어 휴대전화를 발명한 사람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사람이 많은 곳에 가거나 큰 소리로 말하는 무리를 보면 가슴이 뛰고 공포감이 듭니다.  

미스떠르 김 “인도네시아가 1998년부터 개혁기로 들어서면서 빠뿌아도 시끄러웠습니다.” 
 수하르또 정권 말기에 빠뿌아에서 근무했습니다. 1998년 수하르토 대통령이 실각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지방자치가 실시되는 등 인도네시아가 큰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당연히 빠뿌아도 지방자치가 시작됐습니다. 분리주의 운동과 함께 분리주의자들이 활동하면서 치안이 불안해져서 한동안은 밤에 외출도 못했습니다. 

미스떠르 김 “아이들은 한국에 정착해서 살기를 바랐습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시기가 되자, 아내와 아이들만 자카르타로 보냈어요. 빠뿌아에서 한국까지 가려면 힘들어도 빠뿌아에서 자카르타까지는 1년에 한두 번씩은 다닐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아내와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의논했고, 결국 아이들이 성장해서 한국에 정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아내와 아이들을 귀국시켰습니다. 저는 혼자 남아서 수년 더 근무하다가 퇴사하고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인도네시아에서 30여년 간 일했고, 그중 10여년을 빠뿌아에서 근무했습니다. 덕분에 경제적인 안정을 얻었지만, 한국에서 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앞으로도 지금처럼 한국에서 계속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스떠르 김 “휴가를 마치고 인도네시아로 돌아올 때는 부대에 복귀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근무하다가 한국으로 휴가를 갈 때는 설레는 마음으로 갔는데, 돌아올 때는 휴가를 마치고 부대에 복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한국에 두고 인도네시아로 돌아오는데 마음이 무겁고 복잡했어요. 하지만 자카르타에 도착해서 평소 잘 지내던 동료가 나와서 밥 사주며 이야기 들어주는데 많이 위로가 됐어요.  

미스떠르 리 “시간은 인도네시아를 변화시켰어요.”
 제가 처음 인도네시아에 갈 때는 아무 것도 없이 살 수 있는 나라가 인도네시아였는데, 지금은 불안정하고 인정머리 없는 나라로 여겨집니다. 1998년 이후 지방자치단체장을 직접선거로 뽑으면서 행정 경험이 없는 지역유지들이 당선되고 오히려 지방행정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경험했어요. 그러다 보니 예전에는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었다'면, 개혁시기로 들어오면서 원칙이 무너지고 일부 되던 일도 어려워지는 힘든 상황이 됐어요.  

 미스떠르 김과 미스떠르 리는 인도네시아에서 힘든 일도 많았지만 인도네시아에 대한 기억은 대체로 좋다고 말했습니다. 처음 일을 시작하고, 신혼생활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 인도네시아였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가장 왕성하게 일하던 시기를 인도네시아에서 보냈습니다. 인도네시아도 한국도 그 자리에 있지만 사람이 움직였고 시간이 쌓여서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젊은 미스떠르 꼬레아들이 일하며 시간을 역사로 만들고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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