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김은숙] 가슴시린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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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숙] 가슴시린 소녀

깡통의 수다 25
기사입력 2019.02.21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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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네시아 족자에서 사는 김은숙 작가가 <깡통의 수다>를 데일리인도네시아에 연재합니다. 문득 자신의 삶이 깡통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깡통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 지 스스로 궁금해졌다고 합니다. 김 작가는 족자에서 사업을 하는 남편을 내조하고 사남매를 키우면서 사나따다르마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고 수필집 두 권을 낸 열혈주부 작가입니다. 현재 사나따다르마대학교 인도네시아문학과에 재학 중이며, 족자 한글학교 교장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가슴 시린 소녀'

글·사진: 김은숙 

     나이가 드니 소녀 적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내 모습에 자괴감이 들 때가 더러 있다. 그러다가 10년 전 사진만 봐도 새로워, 이런 때도 있었구나! 할 때도 있다. 지난해 11월 22일 시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을 출발했다. 시아버님과 함께 모시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시아버님은 지난해 4월 고인이 되셨다. 홀로 되신 어머님을 시끌벅적한 우리 집에서 지내게 하며 적적함을 덜하게 한다고 한 취지에서 모셨는데 그야말로 나는 대박 바빴다. 숨도 못 쉬게 바빴다. 그도 그럴 것이 나가있던 아이들과 조카, 집 봐주시던 친정어머님, 시어머님에 두 명의 도우미까지 해서 11명이 며칠을 복닥복닥 했다. 거기다 고양이 12마리까지 사람과 애완동물이 반반인 집에서 전쟁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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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정엄마가 먼저 자카르타 아들 집으로 가시고 2주 후에 나가살던 아이들 둘도 각자의 거처로 돌아갔다. 한 달이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한 달은 시어머님과 꽁냥꽁냥 하며 지냈다. 당신이 15살에 시집오던 이야기를 시작해 이제 것 살아오신 숱한 세월 속에 묻은 애환을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가 나의 레이더이었다는 것을 감지했다. 레이더는 전파감지를 해서 그것만을 끊임없이 추적한다. 어머니는 내가 움직이는 방향만을 바라보는 나만의 레이더 이셨다. 두 달 넘게 나와 어머님의 아들의 움직임에 따라 당신 몸을 움직이시던 어머님이 왜 그리 가엾고 안쓰러웠는지 모르겠다.

     시어머니가 계셔서 다 좋았다고 하면 거짓이 분명하다. 그 중에도 어머님과 내가 한 하얀 거짓말은 서로에게 공허한 울림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시작되었다. 어머님의 하얀 거짓말은 거의 큰아들과 큰며느리 큰손자 이야기이었다. 큰아들 자랑은 괜찮았다. 하지만 큰며느리 자랑은 어딘지 모르게 거짓이 다분하셨다. 내가 아는 큰 며느리는 정말 말도 못하게 섭섭한 사람이었다. 그런 큰며느리를 계속 자랑하시기에 내가 먼저 맏동서에게 속상했던 이야기를 풀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님도 서서히 마음의 앙금을 조금 털긴 하셨지만 큰며느리에 대한 흉은 정말 뭐가 무서우셨는지 아니면 내가 같은 며느리라 그런지 하지 않으셨고 항상 어머님에게 잘하신다고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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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어머님에게 한 하얀 거짓말은 “어머님 저희와 같이 사시면 안 되나요? 어머님 더 계시다가 가세요?” 이었다. 생각해 보면 내 머릿속에 어머님이 반드시 그러지 않을 거라는 것을 계산하고 했을 수도 있었던 하얀 거짓말이었다. 사실 어머님이 오시고 꼼짝 할 수 없었다. 삼시세끼 밥을 차려드려야 했고 혼자 밖에 나가면 마음이 편치 않아 가급적 어머님을 모시고 은행 일을 보러 다니고  다른 작은 일에도 시시콜콜 모시고 다녔다. 그렇게 항상 한 달 동안 모시고 다니다 갑자기 손님이 오셔서 하루를 나가 있던 일이 있었다. 어머님 가시기 한 열흘 전 일이었다. 어머님이 섭섭해 하실 줄 알기에 그 전날부터 손님이 계셔서 나갔다 오니까 하루만 잘 지내세요. 하며 양해를 구했고 시어머님도 흔쾌히 허락하신 사항이었다. 그리고 조카까지 꼼짝 말고 시어머님 곁에 있으라고 하고 나갔다 왔다. 손님과 다니다 오후 4시에 집에 들어왔는데 어머님이 삐지셔서 나의 인사도 안 받으셨다. 심지어 내일 집에 가시겠다고 얼음장을 놓으셨다. 나랑은 말도 안 하시고 조카와만 말씀하시는 어머님이 서운하기보다 가여웠다.

     사실 시골에 가시면 어머님과 대화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큰아들과 큰며느리는 늘 바빠서 하루에 한번 얼굴을 볼까말까 하신다. 큰 손자는 서울에 있어 1년에 두 번 아니면 세 번 정도 본다. 어머님의 자식들도 바쁘니 결혼 안 한 막내 아드님만 자주 어머님 안부를 챙기시는 형편이다. 물론 경로당에 나가시면 연세 드신 분들이 계시다. 하지만 그것도 겨울 한철이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연세 드신 분들은 항시 농사일을 하시기에 경로당 운영도 겨울에만 복닥복닥 하는 것 같다. 우리 시어머님 연세는 이제 농사일도 못하시고 집만 보시며 지내야 하는데 그 시간이 얼마나 힘드실지 걱정이다.

     시어머님을 모셔다 드리고 오면서 하얀 거짓말의 대가가 어머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보니 나는 하얀 거짓말의 대마왕이었다.
  “어머님 또 오세요?”
  “죽지 않으면 또 오마.”
그러나 이미 나는 안다. 어머니는 다시는 안 오신다고 마음 굳히신 것을. 15살 꽃 다운 나이에 결혼하셔서 모진 시집살이와 시쳇말로 하면 며느리살이 까지 하신 시어머님이시다. 없는 살림 때문에 큰 자식을 5살까지 키워 하늘나라로 보냈고 70년 해로하신 시아버님과 작년에 사별하셨다. 시골집에 도착하셔서 시아버님 사진을 보며 여행한 동안 왜 그리 늙어지셨냐며 사진에 눈 맞추시던 어머님이 자꾸 눈에 밟힌다. 이제 가슴에서 내려놓고 내일을 해야 하는데 15살 가슴시린 소녀가 나를 붙드는데 자꾸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종국에는 모든 소녀가 저렇게 늙어 아기처럼 될 터인데 요즘 며느리들 그렇게 모질 필요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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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정말 모질 필요가 없다. 사람에게 잘 하고 살아야 한다. 이웃에게 잘하고 살아야 한다. 특히 가족에게도 잘하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가족을 잘 섬기는 것도 커다란 삶의 진리 일 수도 있다. 꼭 붙어있으면서 모셔야 된다고는 말하고 싶지는 않다. 요즘 같은 세월에 어떻게 함께 살 수 있겠는가? 나도 이렇게 멀리 떨어져 살면서 1년에 한번 시집 방문을 한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살아도 사람의 도리를 하며 전화한번 더하는 것, 가끔 아이들 목소리를 들려주며 안부를 여쭙는 것 그 것도 시집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한 방법일 수도 있다. 연세가 드셔서 아흔을 바라보는 시어머님도 열다섯살 꽃다웠던 소녀 시절의 아픔을 이야기 하며 눈물 짖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내게는 어머님이 열다섯살에 시간이 멈추어버린 가슴시린 소녀로 보인다. 그 소녀와 방학을 잘 보냈다. 내가 시가에 하는 모든 것을 우리 아이들은 보고 자랐다. 나는 우리 아이들도 이다음 결혼해서 상대방의 가족에게 잘하면서 살기를 바란다. 어쩌면 이것만이 이 상막한 세상에 함께 잘 살아가는 해답이 될 수 있다고 겸허히 말하면서...

(한동안 글을 못 썼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함께 이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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