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칼럼] 처녀귀신의 도시 이야기/배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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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처녀귀신의 도시 이야기/배동선

인문창작클럽 연재6
기사입력 2017.10.19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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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이는 세상] 처녀귀신의 도시 이야기

배동선

서부 깔리만탄의 주도 뽄띠아낙은 ‘꾼띨아낙’과 같이, ‘처녀귀신’이란 뜻입니다. 애당초 그런 이름이 붙은 데엔 다 그만한 사정이 있겠지만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오늘날의 뽄띠아낙은 처녀귀신이 좀처럼 발붙이기 쉽지 않을 듯한 발전상을 보입니다. 말레이시아 영토인 사라왁(Sarawak)이 지척인 이곳엔 인도네시아 전력공사 PLN의 세이라야(Sei Raya) 디젤발전소도 들어와 있는데 발전기마다 이런 좌표가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발전기 좌표.jpg
 

이 발전기의 위도는 0도 4분 23초. 즉 적도에 거의 붙어 있다는 뜻이죠. 적도는 지구의 허리를 빙 둘러 가며 선을 긋고 있지만 대부분 바다다 보니 적도가 걸친 태평양 상의 섬들은 그리 많지 않은 모양이고 그래서 뽄띠아낙의 적도 선상엔 적도기념비(Tugu Khatulistiwa)가 세워져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

아마도 그곳에서 유일한 민속박물관인 듯한 서부 깔리만탄 박물관(Museum Kalimantan Barat)도 현지문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에겐 가볼 만한 곳으로 선사시대로부터 왕조시대, 네덜란드 강점기의 유물들과 화교 영향을 크게 받은 현지문화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자카르타에 있는 박물관이라면 꼭 있어야 할 어느 한 부분이 쏙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랑스럽게 여기는 독립전쟁의 역사가 송두리째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도시 이름이 처녀귀신이 된 것처럼 박물관에서 독립전쟁을 소개하지 않는 것 역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 당시 뽄띠아낙 술탄왕국이 견지하고 있던 전반적 입장 때문이었으리라 추론하게 됩니다.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948년 1월 최신무기와 월등한 화력으로 전장을 압도하던 네덜란드군과 열악한 무장의 신생 인도네시아군은 두 번째 휴전협정인 렌빌 조약을 맺고 각각의 점령지역 경계를 따라 ‘반묵라인’이라는 선을 긋습니다. 그런데 병력을 증강하고 군세를 정비해도 시원치 않을 인도네시아 측에선 그 사이 병력감축논의가 시작되고 내부 갈등이 심해지더니 급기야 9월엔 중부자바의 마디운(Madiun)에서 공산당 반란이 터져 스스로의 역량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맙니다. 그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네덜란드군은 그 해 12월 휴전협정을 일방적으로 깨고 인도네시아 임시수도인 족자를 침공해 들어갔습니다. 까마귀 작전이라 불리는 네덜란드군의 총공세였습니다. 족자 인근 마구워(Maguwo) 비행장을 탈취한 공수부대를 필두로, 파죽지세로 족자 시내로 진출한 네덜란드군은 술탄의 끄라톤에 피신해 있던 수까르노 대통령, 하타 부통령, 전군 사령관 등을 비롯한 인도네시아 정부를 통째로 나포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적장을 잡았으니 보통의 경우라면 여기서 전쟁은 막을 내렸어야 합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은 여기서부터 사뭇 다른 양상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누가 뭐래도 이 시기에 가장 부각된 인물은 수디르만 장군입니다.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며 족자를 탈출한 그는 폐결핵이 그의 목숨을 급속히 갉아먹고 있었지만 게릴라들과 함께 험한 산속을 행군하며 네덜란드군의 집요한 추격을 뿌리쳤고 인도네시아 전역에 산재한 정부군 게릴라 부대들을 지휘해 몇 차례의 대대적인 총공세를 기획하면서 인도네시아가 아직도 항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립니다. 한편 이 시기에 수마트라의 부낏띵기(Bukit Tinggi)에 샤리푸딘 쁘라위라느가라(Sjarifudin Prawiranegara)가 이끄는 긴급정부(PDRI)가 세워져 인도네시아 정부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죠. 수디르만 장군과 부낏띵기의 긴급정부가 없었다면 인도네시아는 어쩌면 오늘날까지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역사의 격랑이 휘몰아치던 시기에 두 명의 술탄이 그 무대의 한쪽 모퉁이에 등장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족자의 술탄 하멩꾸부워노 9세입니다. 현직 족자 주지사인 하멩꾸부워노 10세의 아버지죠. 네덜란드 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대부분의 술탄들과 왕족, 귀족들이 네덜란드로부터 특권을 누리면서 현지 이권들은 물론 신민들의 노동력과 생명까지 네덜란드에 바쳤던 것에 반해 하멩꾸부워노 9세는 독립전쟁 초창기부터 수까르노의 편에 서서 함께 투쟁하다가 결국 까마귀 작전으로 네덜란드군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됩니다. 나포된 수까르노와 정부요인들은 수마트라 방카섬의 문똑(Muntok)이라는 오지에 유배되지만 족자 신민들로부터 숭배에 가까운 지지를 받는 술탄을 차마 유배시킬 수 없었던 네덜란드군은 그를 끄라톤에 유폐하고 끊임없이 회유를 시도했습니다. 수까르노가 무대에서 사라진 상태에서 족자의 술탄이 네덜란드 편으로 전향한다면 그것은 인도네시아로부터 정식 항복을 받는 것 못지 않은 승리의 증거가 될 터였습니다.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또 다른 한 명은 압둘 하미드 알카드리, 즉 뽄디아낙의 술탄 하미드 2세입니다. 그는 네덜란드군을 도와 하멩꾸부워노 9세를 회유하려고 족자에 왔던 것입니다. 그는 선대 술탄의 장남으로 태어나 네덜란드식 교육을 받으며 엘리트로 성장했는데 당시 자바나 수마트라와 달리 깔리만탄을 포함한 타 지역들은 대체로 네덜란드에 협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태평양전쟁을 맞아 침공해 온 일본군은 깔리만탄의 술탄들 대부분을 살해했고 뽄띠아낙에서도 하미드 왕자의 아버지, 형제들 대부분이 몰살당했습니다. 당시 바타비아(자카르타)에 나와있던 하미드 왕자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가혹한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연합군의 진주와 함께 풀려나 곧바로 네덜란드령 동인도군 대령으로 임용되고, 살해당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뽄띠아낙의 술탄으로 즉위했을 뿐 아니라 네덜란드 당국에 의해 인도네시아 합주국(United States of Indonesia)의 서부 깔리만탄 주국(洲國) 수장으로 등극한 그가 뚜렷한 친네덜란드 성향을 띈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족자의 끄라톤에서 마주한 두 명의 술탄은, 그러나 호의적인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멩꾸부워노 9세는 네덜란드군에게 겹겹이 둘러 쌓여 일견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던 족자 한복판에서 달콤하기 그지 없는 하미드 2세의 회유를 단칼에 거절하는 강단을 보였던 것입니다. 불과 1년 후 세상이 어떻게 바뀔 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하미드 2세는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을 바라보듯 하멩꾸부워노 9세에게 측은한 눈빛을 보냈을 것입니다.

수까르노 본문 120.png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멸망하지 않았고 끈질긴 게릴라전과 외교적 노력, 그리고 국제사회의 압력을 통해 이듬해 인도네시아 독립의 세부사항을 협의하는 헤이그 원탁회의가 열리고 급기야 1949년 12월 27일 네덜란드는 서부 파푸아를 제외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전역의 주권을 인도네시아에 이양하게 됩니다. 수까르노 정부는 고스란히 유배지에서 돌아왔고 고난의 시간을 견뎌낸 하멩꾸부워노 9세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지만, 헤이그 원탁회의 당시 네덜란드 여왕의 보좌단장까지 오르며 최고의 영예를 누렸던 하미드 2세는, 이제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운명의 변덕에 분명 당황하고 있었겠죠. 

두 사람의 악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신생 정부가 자바인들 중심으로 구성되고 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인도네시아는 내전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특수전부대 퇴역장교 베스털링이 조직한 군사단체 APRA가 1950년 1월 반둥에서 일으킨 반란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베스털링은 뽄띠아낙 술탄 하미드 2세를 수장으로 옹립하여 쿠데타를 공모했고 1월 23일 2개 연대규모의 병력으로 기동해 실리왕이 부대원을 100명 가까이 사살하며 반둥 일부를 점령했다가 1월 26일에는 자카르타 기습을 시도합니다. 중앙정부를 공격해 요인을 암살하려 했던 것인데 그 주요목표 중 한 명이 당시 국방장관 하멩꾸부워노 9세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면서 베스털링은 재빨리 싱가폴로 탈출해 네덜란드에서 영웅대접을 받았고 하미드 2세는 쿠데타의 수괴가 되어 자카르타의 법정에 서야만 했습니다. 그때 하멩꾸부워노 9세는 그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았을까요?

뽄띠아낙의 박물관에 인도네시아 독립전쟁과 1900년대 후반부의 현대사 대부분이 통째로 빠져 있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아니, 뽄띠아낙의 술탄이 줄곧 인도네시아 독립과 통합의 반대편에 서있었다는 사실을 구태여 고백하고 싶지 않은 거겠죠. 

물론 그 박물관은 왜 도시의 이름이 ‘처녀귀신’이라 붙었는지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료를 뒤져보면 뽄띠아낙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771년부터라고 합니다. 개척자들이 처음 들어가 나무를 베며 길을 낼 때 숲 속의 귀신들과 마물들이 출몰해 개척자들을 무척이나 괴롭혔고 특히 처녀귀신의 폐해가 컸다고 하죠. 결국 그들이 밤의 정적을 깨는 귀신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화포를 쏘아대면서 개척지를 확대해 나가자 마침내 귀신도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처녀귀신의 본거지가 있던 곳에 사원과 궁전을 짓고 그 사건을 잊지 말자며 그 도시의 이름을 뽄띠아낙, 즉 처녀귀신이라 명명했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뽄띠아낙 이슬람 왕국의 첫 술탄 샤리프 압둘라흐만 알카드리는 8대 술탄인 하미드 2세의 조상이 됩니다. 그로부터 180년 후, 하미드 2세의 대에서 술탄의 왕조가 끊기고 만 것은 어쩌면 자기가 살던 터를 빼앗기고 이를 갈던 그때 그 처녀귀신의 저주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 인문창작클럽(INJAK) 소개 
인문창작클럽 (인작: 회장 박정자)의 회원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개개인의 다름과 차이를 공유하고 교류하면서 재인도네시아 한인사회를 조명하는 새로운 시각이 되고자 노력하는 모임입니다. 

*** 인작회원들의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동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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