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설명: 2015 계간문장 신인상 수상식에서 이태복 시인(오른쪽)
《특집해설》 2017년, 제19회 재외동포문학상(가작), 이태복 시인의 ‘고백’
살라띠가(Salatiga)에서 자바인의 서정을 노래하는 詩人
글: 김주명(롬복시인)
오늘이 며칠인가? 계절은 바뀌고 있는가? 어제 먹은 점심 메뉴가 문득 생각나지 않는데도 내일 해야 할 일들이 새벽안개처럼 이미 내려앉아 있다. 각박하다고만 할 수 없는 현실의 삶들이 화살처럼 지나가는데 시를 쓰고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이태복 시인의 수상작 「고백」을 잠시 들여다보자.
시인은 쉰 나이가 되도록 마음 구석에 아직 고백 못한 죄가 숨 못 쉬고 묻혀있음을 토로한다. 그 중심에는 가족의 원천,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는 당신이 키우던 병아리를 솔개가 채어갈까 싸리막대 하나 맡기고 오일장에 가셨는데, 시인의 심심한 막대질에 맞아 쓰러진 병아리, 담장 아래 몰래 묻었는데 숨긴 마음이 싹이 되어 자랐다고 기억을 되새김 한다. 그 어머니가 적도의 불효자식을 보지도 못하고 하늘나라 가셨고 쉰을 훌쩍 넘긴 예천 꼬맹이는 어느새 인도양 해풍에 조금씩 떠밀려 닿은 자바의 산골에서 머리가 희어진 병아리 앞에 쪼그려 앉아 가시 햇살의 그늘이 되어준다는 詩이다.
현대시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제재(혹은 소재)는 단연, 가족이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기억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이 축적된 기억으로 말미암아 개인이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한다. ‘가족’이 ‘나’의 존재의 근원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수상작「고백」도 어머니에게 고백한다. 시인은 자바의 어느 마을에서, 아무 때나 마주치는 병아리에게서 어머니를 발견한다. 아니, 어머니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머리가 희어진 병아리’를 통해 짐작 해 본다. 하지만 시는 어머니의 기억에만 머물지 않고 ‘싹’을 이야기 하고 있다. 병아리의 주검을 묻어둔 곳에서 ‘싹’이 자라나고 있다. 이태복 시인이 시를 쓰는 본질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어느 곳에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폭넓은 상상을 모체로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시이다. 그리고서 그는 어린 싹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적도의 가시 햇살을 잠시나마 피할 수 있도록 그 자신이 그늘이 되리라고, 이 한 편의 시를 통해 다짐한다.
이태복시인은 동포사회에서 이미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의 근황만 살펴보더라도 2015년 ‘붓과 렌즈로 만나는 인도네시아’ 그림전을 개최하였고 지난해에는 그의 사산시집 「민들레 적도」를 발간하였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인도네시아지부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그가 어느새 자카르타를 벗어나 중부자바의 살라띠가에 자리 잡고, 지난 9월 15일 ‘사산자바문화연구원’을 열었다. 본격적으로 자바문화를 연구 할 채비를 마친 것이다. 그의 첫 시집 ‘민들레 적도(북랜드, 2016)’에는 ‘자바풍경’이 연작시 형태로 첫 장면을 장식하고 있다. 마치 그가 시인으로, 화가로 살아 갈 것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어쩌면 그가 그려낸 자바풍경도 살라띠가를 미리 염두에 둔 것임을 짐작 해 본다. 그의 첫 시집 ‘민들레적도’를 통해 ‘디아스포라의 꿈’을 살라띠가에 심었다면, 이제 살라띠가의 ‘사산자바문화연구원’이 자바전통문화예술의 큰 그늘이 되어 무성한 열매를 맺는 일을 미리 그려본다. 즐거운 일이다.
그의 시에도 고통은 있으나 대부분 평온하고 평화롭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끝에서 바라 본 「자바풍경」 같은 오늘의 삶에 대한 안식이 있다. 그는 인도네시아에서의 삶에 대한 감사와 그 감사에서 오는 기쁨을 노래한다. ‘적도의 야자수도’도 북반구의 소나무도 모두 동량이 되는 삶에 그의 시는 뿌리 내린다. 멀리 바다를 건너 날아가면서도 울지 않는 적도의 꽃, 그 시의 민들레는 상처를 사랑으로 승화시킨 영혼의 노래다.』 - 정호승(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