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인니 노동자의 한국생활
보내는분 이메일
받는분 이메일

인니 노동자의 한국생활

기사입력 2011.10.29 07:0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인도네시아 노동자의 한국생활


박인용(visualshocker@hanmail.net) 작성
양승윤(한국외대 동남아학 교수) 편집


이슬람에 관한 논문을 좀 더 잘 써보고 싶어 이태원에 있는 사원을 방문했지만 대부분의 관심사는 중동이슬람에 관한 것이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나오다가 여러 개의 아시아 마트(Asia Mart)가 있는 것을 보았다.

가게 출입문에는 인도네시아어로 ‘안녕하세요(Selamat datang)’나 ‘국제전화카드(Kartu Internasional)‘ 같은 문구가 붙어 있었다. 그 중 한 군데를 들어가 보았는데 ABC(식품회사명)에서 나온 팩음료와 병에 든 달착지근한 차(茶)인 떼보똘(teh botol) 그리고 인도네시아식 볶음 국수인 미고렝(mi goreng)을 만들 때 쓰는 인도미(Indo Mie)라는 것이 있었다. 몇 개를 집어 들고 나오면서 인도네시아 음악이 있냐고 물어봤지만, 없는 것 같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다만 인도네시아 음악을 더 들어보았으면 한 생각이 있었을 뿐이다. 미루고 미루었던 논문쓰기가 시작되면서 ‘말레이어’에 대한 필요와 ‘말레이시아인’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신도림역 근처에 있는 외국인 근로자 지원센터였다. 그 곳은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상담 ․ 한글교육 ․ 무료진료 등 몇 가지 지원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곳이다. 하지만 찾아간 월요일이 하필 휴무일이어서 몇 가지 자료만 구해 나왔다.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제법 큰 외국인노동자센터였다. 유명한 곳인 만큼 매우 바쁘고 활기차고 왕성한 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기독교인들이 대다수라고 하는데, 종교적 색깔을 최대한 배제한 자세가 봉사자들의 호응도를 높인 것으로 보였다.

한 관계자가 ‘어렵게’ 시간을 내주어서 짧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안산에 말레이시아 노동자들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한국에 말레이시아 노동자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동정책은 우리가 말레이시아에서 배워 와야 할 판입니다.”라는 퉁명스런 대답을 들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안산의 M이라는 인도네시아 식당이었다. 그 식당 주인은 자카르타 출신으로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인도네시아 사람이었다. 가게의 TV에는 인도네시아 국영 TV인 인도시아르(Indosiar)를 비롯한 여러 채널의 인도네시아 TV방송이 나왔다. 주중이라 손님은 거의 없다고 했고,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곳에서 CD와 VCD를 사는 것을 시작으로 일대의 가게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유명세만큼이나 안산역 근처는 한국 내 별천지와 같은 곳으로 다양한 가게들이 밀접해 있고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상대로 하는 전문 가게가 즐비하였다. 이곳의 가게들은 또꼬(toko)와 와룽(warung)이 결합된 형태였다. 또꼬에서는 주로 물품 판매를 취급하고 와룽에서는 음식을 만들어 파는데, 안산의 인도네시아인 상대 가게는 대개 이런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M식당처럼 인도네시아인이 점주(店主)인 몇몇 가게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한국인이 운영하고 있으며, 조리사만 인도네시아 현지인을 쓴다. 누가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가게 매상이 좌우되기 때문에 요리를 잘하는 현지인은 매우 비싼 몸값을 받는다고 한다. 한편, 안산에는 코린도 투어(Korindo Tour)라는 여행업 에이전트가 있는데, 이 업소의 주인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국으로 돌아가는 항공권을 싸게 구입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었다. 이곳 안산지역에서 마음만 먹으면 하루 동안 거의 모든 인도네시아 가게를 돌아볼 수 있고, 한 2-3일이면 모든 식당에서 인도네시아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이곳에서 앞으로 CD와 영화프로를 구입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러한 아쉬움을 풀 기회가 왔다. 우연히 지하철 속에서 인도네시아 노동자를 만났고 반가워서 이것저것 묻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안산이 아닌 A라는 곳에 주로 모인다고 했다. 한 노동자의 전화번호를 얻어서 조만간 A로 전화연락이 닿은 그를 찾아가게 되었다. A는 안산 인근의 작은 도시로 공장지대는 별로 없지만 교통이 편리하여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었다. A를 방문한 날이 운 좋게도 재한 인도네시아인들을 위한 축제가 있던 날이었다. 독립기념을 축하하는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장소는 역시 안산의 한 야외 공연장이었는데, 그곳으로 안내되었다.

공연장에 도착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경기도 지역의 노동자들만 모였다고 하는데도 야외 공연장은 인도네시아 노동자들로 초만원이었다. 혹시 현지 가수가 위문공연을 오거나 한국의 무명가수가 출연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주로 재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로 구성된 밴드가 무대로 나왔다. 이들의 밴드는 주로 출신지 별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롬복(Lombok)출신들은 자체적으로 밴드를 만들어 나왔다. 노래도 장르가 다양하였다. 인도네시아 유행가는 물론이고 한국 가요와 외국 메탈음악도 많이 선 보였다. 놀라운 것은 연주 실력이었는데, 인도네시아에서 가수활동을 한 것같이 수준이 뛰어났다.

이곳에서 확인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무슬림들인 이들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술을 꽤 많이 마신다는 것이었다. 몇 사람에게 확인한 바로는 모두들 한국에서 힘든 일을 하면서 배웠다고 했다. 그 날 공연 도중에 몸싸움이 발생했는데, 지나치게 취해서 비틀거리던 한 노동자가 무대 가까이에서 구경하던 친구랑 시비가 붙었다. 두 사람의 실랑이는 곧 출신지역 간의 패싸움으로 번질 뻔 했는데, 두 차례나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다가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뒤로 밀려났다. 이 날 한명이 칼에 찔렸다는 얘기를 그 후에 듣게 되었다. 이와 유사한 불상사나 작은 충돌이 각종 공연이나 기념행사 때마다 발생한다는 사실을 여러 사람으로부터 확인하게 되었다.

공연이 있던 A의 가계에는 주로 서부 쟈바(Jawa Barat) 사람들이 주로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아볼 필요를 느끼고, 몇 사람에게 수소문하여 다른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다. 때 마침 장마철이었는데, 안산 인근 공단지역 근교에 있는 한 허름한 아파트를 찾아 갔다. 아파트 단지라고 보기는 무리가 있고 약간 큰 연립주택 단지였다. 몇몇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 중 한명이 안산의 야외공연장에서 공연에 나섰던 친구였다.

그의 아파트를 방문했는데, 며칠 전 집이 물에 잠겼었다면서 누추한 집에 초대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 집은 10여 평 남짓했는데, 월세가 약 15-20만원이라고 했다. 한집에 4명에서 6명까지 살고 있는데, 일거리가 있어서 수입이 있는 친구들이 집세를 부담하고 있었다. 같이 사는 친구들이 모두 밴드를 하고 있었는데, 실력이 놀라울 정도였다. 악기는 거위 전부가 중고를 구매하는데, 인근 한국인 가게에서 대여와 판매를 해준다고 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중고 기타 한 대를 10만원씩이나 받고 있었다. 같은 한국인이지만 바가지를 씌워도 너무한다싶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멀리 서울에까지 와서 악기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낙원상가에서 쇼핑할 정도로 시간이 있는 사람도 없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사람도 물론 없었다.

더 많은 가게를 직접 접해보기 위해서 방문한 지역은 시화공단과 인천 외곽의 공단지대였다. 사실 이곳에서는 인도네시아인을 비롯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만나도 시간 내기가 힘들었고, 오지에서 온 한국인과 공단의 외국인 노동자들과 이야기하는 것조차 이들을 고용하고 있는 한국인 사장님들이 너무 싫어해서 시도하기도 어려웠다.

공단에는 주로 아시아 마트(Asia Mart)가 눈에 띠였다. 슈퍼마켓의 업주들이 어디에선가 물건들을 구해다가 파는 곳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의 기호식품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그래서 이들은 여기저기를 수소문하여 엇비슷한 재료를 구해서 아파트에서 음식을 해먹거나 주말에 안산에 있는 인도네시아 가게나 식당에 간다고 했다.

1호선 전철을 타고 남행(南行)해 보기로 했다. 최근에 천안까지 연장된 구간을 따라 가다보면 일부 공장밀집지역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였다. 몇몇 군데에 인도네시아인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었다. 어디에든지 아시아 마트를 발견할 수 있었고, 이곳에는 인도네시아인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구비해 놓고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인들 대상으로 하는 식당 겸 가게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C지역의 경우,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가 인도네시아 가게를 겸업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곳은 가게 점주가 지원센터 소장을 겸하고 있었다. 원래는 봉사활동으로 시작했는데, 재정 문제가 어려워서 가게를 같이 한다고 했다. 인도네시아 여성과 결혼했는데,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어서 물건 값이 싼 편이었다. 문제는 이웃에 있는 경쟁하는 가게가 식당을 겸하고 있는데,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고 했다. C지역에서 만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위치가 경기도를 벗어나 있어서 안산 일대의 소식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연전 추석 때 쁘르마타사리(Uut Permatasari)라는 예명(藝名)의 당둣(dangdut)가수가 서울 KBS 88체육관에서 공연한 적이 있었다. 인도네시아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당둣은 엉덩이를 요란하게 흔드는 춤인데, 여기에 노래까지 잘 해서 인기 만점의 당둣 가수였다. 입장료가 17,500원이나 되어서 입장권을 사지 못하고 가수가 입장할 때 사진이나 찍으려고 몰려든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많았다. 우연하게도 안면이 있는 진행요원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안내로 당둣 가수를 인터뷰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대기실로 안내된 후, 당둣 가수와 함께 사진을 찍을 기회도 있었다. 이때 찍은 사진은 한동안 어디를 가든지 인도네시아인들과 대화할 때, 말 걸기 수단으로 아주 잘 활용되었다.

안산 등지에 있는 인도네시아 가게에서 인도네시아 CD와 VCD를 살 수는 있었지만, 정품은 당연하게 거의 없었다. 정품을 들여올 경우 가격이 지나치게 높아지고 마진도 생각보다 적다는 것이었다. 인도네시아 락 그룹의 하나인 데와(Dewa)의 음반과 몇 개의 다른 음악 CD도 구입하였다. 대부분의 음악 CD는 여러 장의 앨범을 mp3파일로 전환하여 담고 있었다. 적게는 10장 많게는 20장의 앨범도 들어가는데, 앨범 수가 많을수록 음질이 떨어지고 종종 엉뚱한 노래가 들어가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했다. 이런 mp3파일로 전환한 CD는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현지에 갔다 올 때 가져오거나 혹은 현지에서 한국행하는 친지를 통해서 반입된 것을 국내에서 자체 제작으로 복사해서 공급한다고 했다.

가격도 천차만별이어서 싸게는 2,000원부터 살 수 있는 것을 비싸게는 6,000원까지 호가하는 경우도 보았다. 인터넷이 발달되어 인도네시아 현지 사이트에서도 mp3파일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어서 점차로 매기가 떨어진다고 한다. 계속해서 정품을 사는 것은 부담이 되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나마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있었다.

일반 서적이나 잡지 역시 비슷한 경로로 들여오는데, 안산의 한 가게는 점주가 정기적으로 쟈카르타를 오가며 구입해 오는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판매용으로 비치하는 서적은 사전류나 이슬람 성서(聖書) 쿠란이 전부인데, 이 가게는 소설과 잡지 이외에도 꽤 다양한 책들을 비치하고 있었다. 영화도 최신 VCD로 구비해 놓고 있었는데, 문제는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다.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상대로 하는 가게에서 가장 중요한 품목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식품류가 분명하였다. 주요 수입처는 인천과 오산에 있으며 안산에서는 소규모로 물건을 직수입하기도 한다. 각종 인도네시아 산 음료와 미고렝을 비롯하여 땅콩 과자류 ․ 비스켓 ․  캔 음료와 차(茶) 그리고 조리용품 등이 대종을 이룬다. 컨테이너로 들여올 경우,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에 무거운 병 제품 보다는 종이 팩이나 플라스틱으로 된 제품을 선호한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이 수입허가를 받아서인지 물품에 관한 상세한 정보들이 표기되어있었다.

유전자가 변용된 콩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문구가 눈에 띠였고, 수입처와 유통 기한 등이 분명하여 인도네시아어 단어를 몰라도 믿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냉동식품으로는 염소고기(daging kambing)와 바소(bakso) 그리고 두리안이나 일부 고기류가 들어오고 있었다. 바소는 인도네시아인들이 좋아하는 국수이고, 두리안은 ‘과일의 왕’으로 널리 알려진 냄새가 고약한 과일이다.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닭고기에 한해서는 자체적인 유통망을 갖추고 있는 듯 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의 상비약이나 그들이 선호하는 정향(丁香)이 함유된 담배 같은 것도 종종 구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외여행을 떠날 때는 누구나 간단한 상비약과 캔에 든 소주와 고추장 몇 개를 챙겨갔던 것처럼, 이들 상품이 비록 고가(高價)이긴 하지만 고향의 맛을 그리는 마음으로 찾는 것 같다. 이러저러한 일로 한국에 들어오면서 가져온 약을 개인이 소비하지 않고 가게에 내다파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담배도 마찬가지로 면세점을 거쳐서 들어오는데, 인도네시아 가게에서 팔리는 담배의 일부는 이런 경로를 통해서 들어온 것이다. 의약품이나 담배와 같은 경우, 수입 절차가 매우 까다롭고 설령 들여와도 관세나 사후 관리문제에 많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게에서 이런 형태로 필요한 만큼만 구비하고 거래하고 있는듯했다.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한국에서 한국산 담배를 피우거나 혹은 양담배를 피운다. 문제는 이들이 담배를 엄청나게 많이 피운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열이면 아홉 사람은 골초에 가까운 사람들인 것 같다.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인도네시아 물품을 파는 가게에서 가장 많이 구매하는 품목은 전화카드이다. 만 원짜리 카드를 사용하면, 국내통화는 90분에서 두 시간정도 통화할 수 있고, 인도네시아로 국제통화도 한 시간 가량 쓸 수 있다. 그러나 히든(hidden)이라고 해서 실제 통화시간이 표시된 시간만큼 쓸 수 없는 불량카드도 종종 유통되고 있다. 보통 사용가능 시간이 5분 정도가 남아 있는데, 다음번에 사용하려고 카드를 꽂아 보면 즉시 액정이 사라져 버린다. 카드 업체 간의 출혈(出血)적인 할인경쟁이 이러한 결과를 나았다고 한다. 액면가(額面價)가 만원이면 구천 원에 살 수 있고, 만 오천 원이면 만 이삼천 원에 살 수 있다. 싸게 사는 만큼 속임수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카드표면에 ‘속임수 없음’(no hidden)이라는 광고 문구가 실리기도 한다.

현재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각국 노동자들의 흐름을 가장 빨리 파악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카드판매상들이 아닐까한다. 웬만한 행사나 모임에는 거의 모든 유명 카드회사가 참여해서 홍보경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의 구성을 보면 대다수가 쟈바 출신이다. 이들은 다시 서부 쟈바 ․  중부 쟈바 ․ 동부 쟈바로 나뉘고, 또 다시 고향에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인다. 한국에 들어와서 일자리를 구할 때도 소개하고 소개 받는 노동자들을 보면 대개 같은 고향 사람들이다.

어쩌다가 이맘(imam)이나 울라마(ulama) 같은 무슬림 사회의 지도자들이 오기도 한다. 이맘은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고, 울라마는 이슬람종교의 상징적인 지도자이다.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의 서당(書堂)같은 쁘산뜨렌(pesantren)에서 오랫동안 공부하여 이슬람 종교에 대한 지식이 뛰어나고 실제로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도 매우 경건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재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거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면 어디선가 이들이 나타난다. 매우 중요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있는 만큼, 이들이 나타나면 주위 사람들의 행동거지도 다소 조심스럽다. 당연하게 술을 마시거나 소란을 피우는 행의가 조금 줄어든다. 그들 역시 노동자 자격으로 한국에 오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가서 만나기에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다수가 무슬림이기 때문에 비(非)무슬림인 인도네시아 노동자나 중국계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무슬림과는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고,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은 중국계들이 선호하는 가게로 모이기 때문이다. 우연히 만난 복건성 출신의 중국계 인도네시아 노동자를 만났는데, 인도네시아어는 어느 정도 하는데 중국어는 거의 알지 못했다. 중국계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자기 이름 정도만 한자로 쓸 줄 알고 대부분이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최근에 들어오는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해외 노동력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에 비해서 학력수준이 많이 떨어지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 인도네시아 동부군도 출신으로 바하사 인도네시아(bahasa Indonesia)라고 칭하는 인도네시아 국어(國語)를 제대로 못하는 친구들을 종종 만났다. 이들은 자신들의 출신 종족어를 주로 사용하며 종족사회에 ‘폭’ 파묻혀서 숨어 사는 사람들이다. 한번은 작문을 한 것을 수정해 달라고 했더니, 쟈카르타 출신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의 국어 수준이 수준 이하였다. 

인도네시아 노동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가장 질문하기 어렵고 제일 걱정스러운 부분은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근로자나 사장님이 좋은 사람인가’하는 점이다. 제법 많은 인도네시아 노동자들과 꽤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종합적으로 얻은 결론은 “어디를 가든지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마찬가지 아니냐? 나쁜 사장님이 있다고 한국 사람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를 도와주는 착한 한국 사람도 많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라는 것이다. 한국인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와 종족적 편견을 그들은 그렇게 인내하고 있었다.

대다수의 인도네시아 가게를 운영하는 한국인 점주들은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도와주는데 열심이다. 가게의 단골이나 손님들로 만난 인연(因緣) 이전에 인도네시아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 많고 또한 이들 인도네시아인들 때문에 먹고 산다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직접 나서서 도와주기 경우가 많다. 출입국사무소에서 공무원들이 나와서 불법체류자를 연행해가면 남겨진 보따리들을 챙겨주고 출국에 필요한 서류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종종 임금 체납이나 근무처 공장의 관리자나 책임자와 문제가 발생하면, 직접 나서서 전화도 하고 기꺼이 중재(仲裁)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 어떤 이는 인도네시아 근로자들을 위한 이슬람 사원을 지어주고 싶다고 했다. 대부분의 이슬람 사원이 중동이나 파키스탄 출신 무슬림들의 공간이어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왕따’를 당하고 있으므로 이들을 위한 사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가게나 식당에서 파는 물품과 음식은 생각보다 가격이 비싼 편이다. 병에 든 차(茶) 떼보똘(teh botol)이 800원에서 1,000원, 쯩께(cengkeh)라 칭하는 정향(丁香)이 함유된 담배는 2,500원짜리부터 4,000원짜리까지 받는다. 볶음밥 나시고렝(nasi goreng) 한 접시가 5,000원에서 6,000원 선이다. 책은 몇 만원씩도 한다. 한국에 처음 온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거의 1년 동안은 돈을 쓰지 못 한다. 환율 인식 때문이다. “아, 이 물건이 인도네시아에서 10,000루피아니까 한국 돈으로는 1,000원 남짓해야 하는데, 5,000천 원이나 하다니...”하는 식이다. 미고렝(볶음밥) 한 접시가 최소 4,000원씩이나 하니까, 인도네시아에서 사먹던 값의 열 배가 넘는다고 판단하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환율에 익숙해지고 인도네시아 고향에 어느 정도 송금했다 싶으면 그때부터는 꽤나 돈을 잘 쓴다. 값비싼 좋은 물건도 많이 산다. 핸드폰도 고가의 제품을 선호한다. 귀국할 때 팔아도 돈이 좀 되는 물건에는 투자를 하는 셈이다. 어디나 있는 일상사지만, 한국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끼리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미기도 한다. 대개는 같은 나라 사람이나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끼리 만난다.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많은 곳에서는 쉽게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무슬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 많은 곳에서 혼자 또는 두 세 사람이 근무하는 곳에서는 그들이 무슬림이라도 돼지고기 삼겹살을 노릇노릇하게 구워서 소주와 함께 먹고 마시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한국에 오래 머문 노동자들 중에는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 또는 성남의 모란 시장까지 샅샅이 섭렵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굳이 비싼 아시아마트나 인도네시아 가게에 가지 않아도 된다.

재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도 여타의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선량하고 착하고 건전하게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사기성 있는 사람들도 있고 사고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도 있고, 앞 장 서서 선행(善行)을 하는 사람도 있다. 어는 공장에서 일하던 친구가 다치거나 죽으면 기부금을 모으기도 하고, 누가 가게를 열면 몰려가서 물건을 팔아주기도 한다. 개중에는 동성애자들도 있다. 암수가 한 몸에 있는 전기 플러그를 지칭하는 반찌(banci)로 불리는 이들 동성애자는 체한(滯韓) 기간이 긴 사람들 사이에 꽤 많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각을 외국인 노동자나 불법체류자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앞서 같은 인간으로서 동류의식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겠다. 성급한 일반화와 편견의 오류를 깨고 본다면 그들의 일상은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합법적 체류와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가 그들에게 요구되는 만큼, 그들에 대한 배려와 인간적인 대우를 제공할 필요가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한국을 떠나면 외국인이다. 세계화라는 흐름은 이제 누구나 외국인으로 살 수 있게 만들었다. 그들에게 나누어준 마음은 언제가 어떤 형태로든 나와 내 가족과 나의 친구가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길가다가 인도네시아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웃으면서 “안녕하세요?”(Apa kabar?) 해 보자. 이들은 백이면 백 모두 미소지면서 답한다. “그럼요, 인도네시아어를 아시네요” (Baik, Anda...bahasa Indonesia bisa?). 
 

<저작권자ⓒ데일리인도네시아 & www.dailyindonesia.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회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기사제보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회원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