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도 불교문화가 있을까?"
글: 양승윤 한국외대 명예교수 / 가자마다대 초빙교수
호세 빌라 빵가니반(Jose Villa Panganiban)(1903-1972)이라는 필리핀의 세계적인 사전학자(lexicographer)가 있다. 수많은 그의 업적 중에 하나가 타갈로그(Tagalog)어 3만 개의 어원(語源)을 추적하여 집대성한 것이다. 타갈로그어는 오늘날 약 30%의 필리핀 국민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생활언어이자 영어 사용을 선호하는 나머지 국민들이 이해하고 구사하는 제2언어이다. 타갈로그어는 영어와 함께 이 나라의 공식 언어이며, 독자적으로 국어의 지위를 차지하기도 했었다. 초대 대통령 마누엘 퀘손(Manuel L. Quezon: 1878-1944)이 타갈로그 애호가였다. 독재자 마르코스(Ferdinand Marcos: 1917-1989)도 공식적인 연설 중에도 영어로 연설하다가 타갈로그어로 바꾸기도 하고, 그 반대로도 연설하여 외국인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마르코스 뒤를 이은 코라손 아퀴노(Corazon Aquino: 1933-2009) 대통령이나 그녀의 아들인 베니그노 아퀴노(Benigno Aquino III) 대통령도 타갈로그 애호가였다. 필리핀 일각에서는 타갈로그 선호를 ‘필리핀 사랑’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호세 빵가니반이 취합한 타갈로그 단어 3만 개의 어원 중에는 300년 이상 지속된 스페인 통치시대(1521-1898)의 유산으로 스페인어 단어가 4,000개로 제일 많다. 미국 통치시대(1898-1945)의 강력한 영어교육으로 영어 단어도 많다. 1,500개에 이른다. 중국 복건어(福建語)도 1,500개로 영어와 같다. 타밀(Tamil)어와 산스크리트어(300개), 아랍어(200개)도 순서에 든다. 이들 언어 상위에 믈라유어가 있다. 3,200개로 스페인어 다음이다. 필리핀이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와 같은 믈라유 문화권이라는 뚜렷한 증좌(證左)다. 남녀(男女)라는 단어를 찾아 보았다. 타갈로그어 남자는 lalaki다. 믈라유어로는 lelaki다. 여자는 타갈로그어로 babae인데, 믈라유어에서 이와 유사한 단어로 babu가 있다. 여성을 지칭하는데, 하녀(下女)라는 뜻이다. 오래 전에 필리핀 여행을 하면서, 포켓용 타갈로그어 사전을 샀었다. 수치를 정확하게 계량할 수는 없었지만, 대략 20-30%는 믈라유어 단어와 같거나 매우 유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필리핀 군도는 수마트라로부터 쟈바를 거쳐 깔리만딴(보르네오)과 연결되어 있다. 이를 대순다열도(the Greater Sunda Islands)라 하며, 수마트라 남부 빨렘방(Palembang)을 중심으로 발흥했던 스리비자야(Srivijaya) 왕국(650-1377)의 장대한 소통로(疏通路)였다. 이 왕국은 일찍이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사이의 말라카 해협의 양안(兩岸)에 산재되었던 수많은 군소 무역왕국을 평정하고,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뿐만 아니라, 미얀마와 태국 남부로부터 대순다열도를 경유하여 필리핀 군도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크게 번성했던 해양부 동남아 최초의 불교왕국이었다. 무역왕국 스리비자야는 영토 확장을 통해서 왕국의 통치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고, 교역 행위를 통한 상호 이익제고에 초점을 맞추었으므로, 해안 요지의 군소 무역왕국들은 큰 부담 없이 스리비자야의 영향권으로 들어 왔다.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Mindanao)와 보르네오 북동부 사바(Sabah) 사이에 술루(Sulu) 바다가 있다. 이 바다를 가운데 두고, 서북쪽으로 빨라완(Palawan) 섬이 길게 늘어서 있고, 동남쪽으로 술루 열도(列島)가 전개되고 있다. 술루 열도의 중심에 인구 14만(2010)의 유서 깊은 역사도시 홀로(Jolo)가 위치한다. 홀로는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크게 번성했던 술루 이슬람술탄왕국(Islamic Sultanate of Sulu) 도읍지였으며, 이 왕국은 1578년부터 1851년까지 거의 3세기 동안 독립적인 이슬람 술탄왕국을 유지했다. 이왕국의 전성기에는 보르네오 북부의 브루나이 왕국과 쟁패하면서 필리핀군도 전역과 사바 지역까지 영향권 하에 두었다.
영국 주도로 진행된 싱가포르와 사라와크·사바를 포함한 말레이시아연방 결성(1963년 9월)에 이르는 과정은 순탄하지 못했다. 인도네시아는 연방이 결성된다면, 대 말레이시아 전쟁 불사하겠다며 대결정책(Confrontation)을 선언했고, 필리핀은 강력하게 사바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오늘날까지도 필리핀 헌법에는 사바가 자국령임을 명기하고 있다. 이러한 분쟁의 와중에서 1963년 7월 마카파갈(Diosdado Macapagal) 필리핀 대통령의 제안으로 마필인도(Maphilindo)라는 3개 분쟁 당사국 간의 협력체가 탄생했다. 이를 오늘날의 아세안(ASEAN)의 원류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마필인도는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3개국이 모두 믈라유족이 중심인 믈라유 문화권의 나라라는 공통된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믈라유족이 오랜 역사를 통하여 필리핀 군도로부터 마다가스카르(Madagascar)에 이르는 믈라유 문화권을 형성할 수 있었던 배경은 이들 믈라유족이 언제 어느 지역에서라도 현지 적응에 능하여 현지 문화를 받아들이고 현지 왕권에 복속하는 종족 특유의 순응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바다의 실크로드에 따라 대부분의 믈라유족이 이슬람을 수용했지만, 이들이 중부 베트남에 세웠던 참파(Champa)왕국은 힌두왕국이었으며, 필리핀에서는 이슬람을 거쳐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필리핀 사람들은 매우 종교적이다. 이들은 종교기념일과 축제에 열광적으로 참여한다. 아기 예수의 동상이 있는 마닐라의 퀴아포(Quiapo) 광장은 매 년 ‘검은 나사레노의 축제’(Black Nazarene)를 위하여 수십만 명의 군중이 몰려든다. 대부분의 도시 빈민들은 이 날 아기 예수의 동상을 만지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성주간’(聖週間: Holy Week)에는 종교적 헌신과 신의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서 광신적인 신자들은 손톱으로 십자가를 파기도 하고,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자신의 신체를 자해하기도 한다. ‘만령절’(萬靈節: All Souls’ Day)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죽은 사람들과 영혼의 대화를 위해서 가족 단체로 공동묘지를 찾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필리핀 사람들의 종교적인 집착은 이 나라에서 종교와 정치가 서로 강하게 연계되는 전통을 만들었다. 필리핀 현대사에서 종교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스페인 통치자들이 필리핀에 식민통치를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가톨릭교회를 이용하였다. 필리핀 민족주의자들이 독립투쟁을 해 나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식민통치시대가 내도하면서 새로운 식민통치자들은 가톨릭교회를 억제하는 대신 프로테스탄트를 통치매체로 활용하거나 통치도구로 이용하였다. 마르코스도 교황을 맞이하기 위하여 계엄령을 해제한적이 있었으며, 마르코스 독재정권 타도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필리핀은 루존(Luzon), 비사야스(Visayas)군도, 민다나오(Mindanao)등 세 군도군이 거느린 7,641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구성된 군도대국이다. 국토면적은 301,780㎢다. 이 나라는 동남아의 3대 인구대국의 하나로 인도네시아 다음 순서인데, 최근 몇 년 사이에 1억 명을 돌파하였다. 2013년 세계은행 통계로 9,840만 명이었던 인구가 2017년 3월 추계로 1억 350만으로 증가한 것이다. 동남아의 3위 인구대국은 베트남으로 9,270만 명(2016년)이다.
필리핀은 종교적으로 세속국가임을 전제로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다. 이 나라는 전체 국민의 최소 92%가 기독교를 신봉하는데, 81%는 로마 가톨릭교도이며, 11%는 다양한 갈래의 프로테스탄트교도이다. 제2의 종교는 이슬람이다. 전체 인구의 약 5.6%가 무슬림이라는 정부 통계가 있고, 2012년에 국가무슬림위원회(NCMF: National Commission of Muslim Filipino)는 전체 인구의 11%인 1,070만 명이 무슬림이라는 정부 당국과 다른 통계를 내놓았다. 약 2% 가량의 애니미즘이나 샤머니즘 같은 토착종교 신봉자들도 있다. 불교는 작은 숫자의 일본계 필리피노들이, 도교 성향의 불교는 중국계 후예들이 신봉하고 있으며, 더 작은 숫자의 힌두교도들도 있다.
종교의 천국인 이 나라의 특이한 종교문화는 기독교의 다양성이다. 개신교와 필리핀 토착 기독교와 그리고 수많은 신흥 기독교파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스페인 식민통치자들은 식민 지배를 시작하면서 자연현상 하나하나에 대해 별개의 신이 존재한다는 필리핀의 토착 애니미즘을 인정하고, 그 위에 기독교의 보다 전능한 신의 존재를 전파하였다. 이 종교정책은 성공을 거두어 대부분의 필리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이로 인해서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통치는 필리핀 가톨릭교회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비교적 안정적으로 순탄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스페인에 대한 독립운동이 전개되면서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한 토착적인 기독교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Gregorio Aglipay)가 세우고, 독립영웅 아귀날도(Emilio Aguinaldo)가 적극 지원한 필리핀독립교회(Philippine Independent Church)다. 당시 이 교회는 강력한 민족주의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가톨릭 성직자를 끌어들이고, 한때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빼앗아 올 수 있을 정도로 교세가 막강하였다. 펠릭스 마날로(Felix Manalo)가 1914년에 세운 그리스도교회(Church of Christ) 경우도 있다. 이 토착 기독교 종파는 매우 권위적이고 엄격한 교리가 특징이어서 신자들에게 청렴한 생활을 요구하고, 신자들의 헌금도 교회가 할당하며, 선거 때마다 교회가 지지할 후보를 정해 주기도 한다. 이 교회는 오늘날까지 필리핀독립교회와는 다르게 필리핀 전국에 걸쳐서 일정한 비율의 신자를 확보하고, 토착 기독교 종파의 하나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은 오늘날까지도 개신교 세력이 가톨릭교회의 지배적인 영역과 영향력을 넘볼 수 없는 세계 최대의 가톨릭 왕국이다. 이 나라에서 가톨릭교회는 종교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면에서도 가장 강력한 사회적 세력임이 분명하다.
필리핀의 초기 불교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역사자료의 편린(片鱗)으로부터 필리핀군도에도 9세기경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수마트라에서 쟈바와 보르네오(깔리만딴)를 거쳐 필리핀 군도를 연결하고 있는 대순다열도의 일원인 필리핀도 6세기부터 13세기까지 순다열도 전역을 폭넓게 관장하고 있던 스리비자야 불교왕국의 영향권이었을 것이다. 9세기경의 스리비자야 불교유적이 필리핀에서도 발견되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바닷길이 이어져 있고, 상호 이익이 되는 정교한 교역망으로 연계되었으며, 믈라유어를 사용하는 믈라유족이 대순다열도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확실성을 더해 준다. 이를 토대로 9세기나 아마도 그 이전에 이미 인도 원시불교의 한 갈래인 바즈라야나(Vajrayana)불교가 필리핀에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바즈라야나는 해양부 동남아에 널리 분포된 마하야나(Mahayana)불교의 일원이다.
2010년 인구센서스에서 필리핀의 불교도는 당시 인구 9200만의 0.05%인 46,558명으로 조사되었다. 2%에 달한다는 자료(Wikipedia)도 있지만, 이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1억 인구를 넘어서 종교자유의 나라 필리핀에서 생활종교를 지향하는 필리핀 불교계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다소 교세가 신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나라의 대도시에는 현대식으로 지은 불교사찰들이 꽤 많다. 대만(臺灣) 불교를 대표하는 불광사(佛光寺)가 필리핀에서도 현대 불교 포교에 열중하고 있다. 메트로 마닐라에 위치한 호구앙산 마부하이 사원(Fo Guang Shan Mabuhay Temple)이 이들 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데, 이곳에서도 불광산만년사(佛光山萬年寺)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