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가탄신일을 기념해 보로부두르 불교사원에서 승려들이 행사하고 있다. (데일리인도네시아 자료사진)
3. 스리비자야 왕국과 구법승들
글: 양승윤 한국외대 명예교수 / 가자마다대학교 초빙교수
다음글은 2017년 3월 2일자 불교평론에 게재된 '인도네시아와 주변 믈라유 문화권의 불교'라는 제목의 글을 불교평론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데일리인도네시아에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700년 넘게 장수한 인도네시아 스리비자야 왕국은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500년 동안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중심부였다. 앞서 살펴보았듯 이 왕국은 수마트라 남부 빨렘방(Palembang)을 중심으로 말라카(Malacca)해협 양안(兩岸)의 전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 태국 남부와 미얀마와 자바에 걸쳐서 광대한 통치권역을 형성하며 크게 발흥했던 불교왕국이었다. 말라카해협의 전략적 요충지를 모두 차지했던 스리비자야는 8세기 말에 이미 400~600톤 규모의 거대한 선박을 건조하여 인도와 중국을 왕래하는 정기 무역항로를 개척했었다. 이 왕국의 통치자는 불교도였으며, 중국과의 교역 품목 중에는 비단과 도자기 이외에도 사찰에서 사용하는 각종 불교용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징과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당나라 고승 이징(義淨)이 찬술한 스리비자야 왕국 여행기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과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 당시의 상황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스리비자야에서 1,000명이 넘는 승려를 발견했으며, 여러 나라에서 온 장사꾼들이 자주 어울리고 있었다고 전했다. 이징은 이어서 인도로 가는 학승(學僧)들은 한두 해쯤 스리비자야에 머무르며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추천했다. 그는 672년 37세 때 광저우(廣州)를 떠나 바닷길로 스리비자야의 수도 빨렘방을 거쳐 인도에 도착하여 범어를 배우고 범본(梵本) 불경을 얻어 694년 당나라로 돌아왔다. 이징은 12년에 걸친 인도와 당, 당과 인도 간의 바닷길에서 만난 남해 제국(諸國)의 여행기를 통해서 인도와 스리비자야 왕국 등 여러 나라의 불교 상황과 승려들의 생활상, 그리고 일반 서민들의 사회와 풍물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이징은 측천무후(則天武后)로부터 삼장(三藏)이라는 불계 최고의 칭호를 하사받은 당대 으뜸의 고승이었다. 이징의 속명(俗名)은 장웬밍(張文明, 636~713)이며, 유럽에서 발간된 그의 번역본들은 Yijing 혹은 I Tsing으로 원저자명을 표기하고 있다.
혜초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신라 스님 혜초(惠超, 704~787)는 열여섯의 나이에 당나라에 건너가 금강지(金剛智)라는 중국 이름을 쓰고 있던 천축국(天竺國) 인도의 밀교승 바즈라보디(Vajrabodhi)의 가르침을 받았다. 혜초 스님이 20세가 되었을 때, 스승의 권유로 천축국 인도로 떠나게 되었다. 혜초는 723년 광저우를 떠나 이징의 여행길을 더듬어 바닷길로 인도에 닿아 다섯 천축국(동천축, 남천축, 중천축, 서천축, 북천축)을 섭렵하고, 중앙아시아와 일부 러시아 지역을 거친 후 일찍이 세계의 지붕으로 알려졌던 파미르(Pamir) 고원을 넘고 둔황(敦煌)을 지나 727년, 4년 만에 장안(長安)으로 돌아왔다. 실로 치열한 구도(求道) 여행이었다.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aul E. Pelliot)가 둔황(敦煌) 막고굴(莫高窟)에서 발견했던 혜초의 기행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아홉 장의 황마지(黃麻紙)를 이어 붙인 두루마리였다. 총 길이 358cm, 너비 28.5cm의 황마지 두루마리는 앞과 뒷부분이 많이 잘려나갔으며, 마모되어 확인할 수 없는 글자까지 합치면 6,300여 자가 쓰여 있었다. 그러나 여러 관련 자료를 통해 추정하면 《왕오천축국전》의 전체 분량은 약 1만 1,300자로 추산된다고 한다. 둔황은 오늘날 중국 서북부 간쑤성(甘肅省) 주취안(酒泉)에 있다.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의 《동방견문록》이나 모로코 출신 탐험가 이븐 바투타(Ibn Battuta, 1304~ 1368)의 여행기 《리흘라(Rihla)》보다 5세기를 앞선 기록이 《왕오천축국전》이다. 혜초 스님은 출발지로부터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방향과 소요 시일, 경유지에서 만나는 왕국의 도읍지와 규모, 통치 상황, 주변 왕국과의 관계, 지형과 기후, 음식과 각종 특산물, 의상과 풍습, 주민들의 언어생활, 불교의 발전 정도와 기타 종교 상황 등을 순차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징과 같은 바닷길을 택한 혜초 스님은 사전에 이징의 스리비자야 왕국 여행기를 거듭거듭 독파하였을 것이고, 이징의 권고에 따라 얼마간 스리비자야 왕국에 체류했을 것이며, 잘려나간 《왕오천축국전》 앞부분에 이 왕국에 관한 사실적 묘사를 충실하게 남겼을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 보로부두르 불교사원에서 바라본 머라삐 화산 (데일리인도네시아 자료사진)
4. 언덕 위의 승방(僧房) 보로부두르
보로부두르(Borobudur) 대탑사원은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 마글랑(Magelang) 남서쪽에 위치하는데, 인도네시아의 역사문화 중심도시인 족자카르타(Yogyakarta)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보로부두르는 ‘바라(bara)’와 ‘부두르(budur)’ 두 단어의 합성어로 이루어졌다. 바라는 산스크리트어의 비하라(vihara)에서 차용하였는데, 오늘날 인도네시아에서 ‘힌두교나 불교 사원이 있는 공간’을 뜻하는 비하라(bihara 또는 wihara)로 쓰이고 있다. 부두르는 비하라의 어원과 달리 발리(Bali)어의 브두후르(beduhur)에서 차용하여 부두르로 변형되었으며, ‘위쪽’이라는 뜻이다. 이는 인도네시아 불교문화에 정통한 수타르노(Soetarno R.) 교수가 1986년에 출간한 《인도네시아의 다양한 고찰(古刹)(Aneka Candi Kuno di In-donesia)》에 나오는 각주 설명의 일부이다. 보로부두르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위쪽의 절’ 또는 ‘윗동네의 절’이 된다.
보로부두르는 캄보디아 씨엠레아프(Siem Reap)의 앙코르 사원과 인도 마드야 프라데쉬(Madhya Pradesh)에 위치한 산치(Sanchi) 사원과 더불어 세계 3대 불탑(佛塔)으로 알려졌다. 기네스북은 2012년 오랜 논란 끝에 이들 세 사원 중에서 보로부두르를 세계에서 가장 큰 불교사원으로 공식 발표하였다. 위쪽의 절이나 윗동네의 절로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유다. ‘큰 재 너머 대승원(大僧園)’으로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봐도 세계 최대 이슬람국가 인도네시아에 현존하는 세계 최대 불교 사원의 이름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세상의 많은 큰 불교사원과 차별성을 두기 위한 역발상(逆發想)에서 누군가가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을 ‘언덕 위의 승방(僧房)’으로 작명해 놓았다. 이 또한 불교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 불자들의 최대 축일은 와이삭(Hari Raya Waisak)이라고 한다. 와이삭은 태음력과 태양력을 둘 다 기초한 인도 달력 2월인 비사카(Visakha) 월의 보름날이다. 북방불교에서는 석탄일을 음력 4월 8일(2017년은 5월 3일)로 정하고 있지만, 남방불교에서는 비사카 월의 보름날을 축일로 삼고 있어서 2017년의 경우 5월 11일이다. 이날을 베삭(Vesak)이라 하는데,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어 발음의 편의에 따라 와이삭(Waisak)으로 불린다. 북방불교의 석탄일과는 달리 남방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탄생과 성불과 열반이 모두 이날 하루에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와이삭을 공식적인 국가 종교휴일로 채택하고 있다.
와이삭 축제는 매년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에서 행해진다. 불자들은 축제에 앞서 보로부두르에서 약 7㎞ 거리에 위치한 문띨란(Muntilan) 마을의 믄듯(Mendut) 사원에 모여 봉축 불공을 드리고, 보로부두르까지 불경을 봉독하며 도보로 행진한다. 도보 행진 중간에 잠시 빠원(Pawon) 사원에 머무르는데, 믄듯과 빠원 사원을 거쳐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에 이르는 길은 일직선상에 있고, 옛날에는 돌벽돌을 깐 도보 순례길이 이들 세 사원을 연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도보 행진의 전통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로부두르에서 와이삭 축제가 벌어지면, 인근의 주민들과 많은 관광객이 운집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인도네시아 불교도들은 자신들의 종교 행사가 비종교적 요소가 가미되어 관광 상품화되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불교문화는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을 빼고는 설명이 어렵다. 그만큼 보로부두르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인도네시아의 불교왕국 시대는 7세기 중엽 수마트라 중심의 스리비자야 왕국이 열었다. 같은 시기에 자바에도 스리비자야의 불교문화 영향이 전파되어 힌두왕국과 쟁패하면서 8세기 중엽 자바 동북부에서 사일렌드라(Sailendra)로 크게 발흥하였다. 이로써 수마트라와 자바에 불교문화가 만개하는 시대가 도래하였는데, 이때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이 축조되었다. 사일렌드라 왕조는 9세기 초에 축조를 시작하여 825년경에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을 완공하였다. 산자야 힌두왕국과 결혼동맹으로 자바의 주도권이 산자야로 넘어가면서 보로부두르는 점차 사일렌드라 불교왕국과 불교도들의 관심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는 1006년에 일어났다. 인근 머라삐(Merapi) 화산의 대폭발로 두 자바 왕국의 터전이 사라지면서 보로부두르 대탑사원도 화산재에 묻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득력이 있는 반론도 있다. 사원 축조의 완성과 동시에 불교의 깊고 오묘한 뜻에 따라 인위적으로 덮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원 기초를 닦은 흙과 사원을 덮고 있는 흙이 화산재 말고도 사원 바닥과 같은 성분의 흙이라는 것이다.
800년 넘게 흙더미에 묻혀 있던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이 적도의 뜨거운 태양 아래 재등장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 경(Sir Thomas Stamford Raffles, 1781~1826) 덕분이었다.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를 받던 인도네시아가 유럽 정세의 변화로 잠시 영국의 통치하(1811~1816)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때 영국 총독으로 바타비아(오늘날의 자카르타)에 등장한 인물이 싱가포르의 설계자인 래플스 경이었다. 말레이어에 통달하고 말레이문화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던 그는 자바의 각종 고문서와 자료를 통해서 보로부두르의 존재를 확신했다. 그는 1814년 탐사에 착수하여 수개월 만에 인류의 소중한 문화재를 발굴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낸 보로부두르는 다시 네덜란드의 수중에 놓이면서 고초와 쇠락을 거듭하였다. 여러 차례 대륙부 동남아로 진출을 시도했던 네덜란드는 다수의 보로부두르 불상의 머리 부분을 절취하여 불교왕국인 태국의 왕에게 진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총 504기의 부처님이 모셔진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의 불상 중 약 35%에 두상 부분이 없는 이유이다.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적으로 복원하기로 결정, 1973년부터 10년 동안 막대한 예산을 지원하여 세계 7대 불가사의 하나로 세계인들의 앞에 웅자(雄姿)를 드러내게 되었다. 1990년대 이래로 연간 250만 명이 방문하는 보로부두르는 1991년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경이적인 불교사원 보로부두르는 폭 124m의 정방형 위에 9층 건물 높이로 세워져 웅장하기 이를 데 없다. 원래는 높이가 42m였으나 현재는 35.3m로 침하되어 있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가로 세로가 각각 50㎝, 높이가 30㎝ 크기의 안산암(安山巖)과 화산암(火山巖)을 깎아 돌벽돌로 사용하였는데, 내부의 공간 없이 접착제나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1만 4,165㎡에 달하는 면적 위에 100만 개가 넘는 돌벽돌 350만 톤을 완벽한 배수시설 위에 차곡차곡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쌓아 올렸다. 보로부두르를 불가사의하다고 표현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는 사원을 중심으로 반경 30㎞ 이내에는 보로부두르 축조에 사용한 돌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보로부두르에는 총 73기의 종탑 모형의 스투파(stupa)와 504기의 부처님이 있다. 필자가 보로부두르를 대탑사원으로 칭하는 연유이다. 이곳에는 4개 층에 거쳐서 5㎞에 달하는 회랑이 있고, 회랑 좌우 면에는 총 2,500개의 부조(浮彫)가 있다. 이 부조에 등장하는 인물은 1만 명이 넘는다. 거대한 조각 작품의 숲인 셈이다. 조각 중에는 항해 중인 대형 선박들이 많이 나온다. 사일렌드라 왕조 시대에 이미 인도네시아 군도는 해상 실크로드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이 회랑을 따라 돌면서 마지막 계단에 오르면 종탑 모형의 스투파가 있고, 스투파 안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이곳의 불자들은 부처님의 몸에 손을 대고 소원을 말하면, 언젠가는 그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은 이른 아침에 안개가 걷히기 전에 보아야 한다. 안개 속에 잠긴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면, 누구나 속세의 모든 허물이 정화되어 극락의 문 안으로 들어서는 느낌을 받는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하나둘씩 조명이 켜지는 늦은 시간에 좀 멀리 떨어져서 보는 보로부두르도 장관이다. 내세를 확신하는 불자들은 보로부두르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