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양승윤칼럼] 마두라족은 왜 강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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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윤칼럼] 마두라족은 왜 강성인가?

기사입력 2017.02.01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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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ura_locator.jpg▲ 녹색 부분이 마두라. [위키피디아]
 
글: 양승윤 한국외대 명예교수

 인도네시아 2억 5300만 인구(2016년)의 67퍼센트 가량인 1억 7000만 명이 쟈바에 모여 산다. 쟈바의 주 종족은 쟈바(Jawa)족, 순다(Sunda)족, 마두라(Madura)족 등 세 종 족이다. 쟈바족은 쟈바섬의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순다족은 쟈바의 서부에 집중되어 있고, 마두라 족은 쟈바 동북부의 마두라(Madura)섬과 인근 수라바야(Surabaya)와 동부 해안지역에 모여 살고 있다. 이들 세 종족 중 쟈바족이 월등하게 많고, 마두라족이 가장 적다. 마두라족이 집중되어 있는 마두라 섬의 면적은 5,168km²이며, 372만 명 (2014년)이 거주한다. 마두라족은 마두라어와 인도네시아어(bahasa Indonesia)를 사용하며, 대부분이 순니(Sunni) 이슬람을 신봉하는 신실한 무슬림들이다.

 2010년도 인도네시아 종족별 인구센서스에서 마두라족이 720만 명으로 집계됐다. 절반가량이 마두라 섬을 떠나서 사는 셈이다. 이 나라의 제2의 항구도시인 수라바야(Surabaya)와 인근 동부 쟈바 북부해안으로 가장 많이 이주하였고, 서부 칼리만딴(Kalimantan Barat)이 다음 순서쯤 된다. 네덜란드 식민통치시기부터 소규모의 자발적인 이주도 있었지만, 수하르토(Suharto) 통치기에 정부 시책에 따른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졌다. 정부 시책을 역행해서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수도 쟈카르타와 인근 위성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이주한 사람들 역시 많다.

 마두라의 역사는 마따람(Mataram)왕조의 역사와 궤(軌)를 같이 한다. 마따람의 술탄 아궁(Sultan Agung III)은 17세기 초 마두라를 정복하고, 마두라에 쨕끄라닝랏(Cakraningrat) 왕조를 두었다. 마두라와 수라바야 일대에서 남성 이름 앞에 쨕(Cak)을 붙이는 전통은 쨕끄라닝랏 왕조에서 유래한 것 같다. 남성 쨕에 대하여 여성 이름에는 닝(Ning)이다. 이 왕조는 마따람에 고분고분하지 않았고,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은 일찍이 몽고의 침략을 피해 이주한 중부 베트남의 참(Cham)족을 포함하여 쟈바 진입이 좌절되어 마두라로 우회했던 외부 종족들과의 잦은 생존투쟁으로 거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쟈바족이나 순다족들에게 쟈바의 주요 종족으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북수마트라의 바딱(Batak)족처럼 거칠고 야만성을 지닌 종족으로 치부되었다. 그래서 쟈카르타 인근의 대규모 공단에서 근로자들을 모집하면서 마두라와 바딱 출신을 기피하기도 한다.

 토양이 비옥하고 고온다습하여 벼농사에 적합한 쟈바와 달리 인접한 마두라 섬은 고온건조한 기후다. 화산과 고원지대로 이루어진 쟈바 동부의 지형 탓이다. 토지 자체도 대부분이 석회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화산 폭발로 생긴 지표의 균열로 대부분의 강우가 지하로 빠져버린다. 지하수도 건조한 기후로 쉽게 고갈되어 마두라 섬은 자주 물 부족 현상을 겪는다. 이로 인해서 천수답이 크게 제한되어 있고, 주로 옥 수수 · 감자 · 땅콩 · 카사바(cassava) 등을 재배한다. 이곳의 특용 작물로는 네덜란드 식민통치 시대 이래로 일부 지역에서 소규모로 재배하는 담배와 정향이 있다. 그래서 마두라섬은 주요곡물을 대체할 작물도 풍족하지 못하다. 이들이 전통적으로 어업에 종사하거나 소금 생산에 나선 이유다. 생계를 위하여 오랫동안 바다의 풍랑에 맞서다 보니 마두라 족의 성격은 자연스레 거칠고 강인하게 되었다. 술라웨시의 부기스(Bugis)족처럼 마두라족도 뱃사람으로 유명하다.

마두라.jpg▲ 마드라 지역 촌장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마두라 족은 1930년대부터 인근의 서부 칼리만딴 (당시는 보르네오) 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자연재해가 반복되어 식량을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인데, 이들의 이주로 다약(Dayak)족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칼리만딴 전 지역에 걸쳐서 군거해 온 다약 족들은 정글 속에서 화전을 일구어 고구마 같은 구근(球根) 작물을 심고 수렵 활동을 해왔다. 이들은 이슬람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고, 1920년대 말부터 본격화된 서구의 선교활동으로 기독교를 신봉하기 시작하였다. 거칠고 단결력이 강한 이슬람 마두라 족과 역시 정글 속에서 군거하며 집단생활을 통해서 종족의 안위 문제를 중요시해 온 기독교 다약족 사이에 생존 차원의 갈등이 점차 심화된 것이다.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에 걸쳐 비산유국들이 오일 쇼크를 거친 후,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오일 달러가 쏟아져 들어오자 인도네시아는 예상 밖의 잉여예산으로 인구조밀 지역에서 저개발지역으로의 주민 이주정책을 개발하였다. 세계은행(WB)과 아시아개발은행(ADB)이 적극 나섰고, 인도네시아와 정책적 유대관계를 가진 유럽국가들도 수하르토 정부의 이주정책을 도왔다. 가난한 사람들을 대거 저개발지역으로 이주시켜 일자리를 만들고 지역발전을 돕는다는 취지였다. 1979년부터 1984년 사이에 2억7000만 달러를 투입하여 535,000가구 250만 명을 이주시켰다. 이주정책은 2015년 죠코 위도도(Joko Widodo) 대통령 정부가 들어서서 기존의 정책을 중단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주로 마두라와 발리에서 파푸아, 칼리만딴, 수마트라, 술라웨시 등지로의 이주였다.

 1997년 말 IMF 국제금융 위기가 닥치고, 이듬 해 5월 수하르토 정권이 무너지고, 이주민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중단되자 이주민들의 거주 지역에서 원주민과 이주민 간의 유혈폭동이 크게 증가하였다. 1997년에 나온 한 NGO 단체의 보고서는 칼리만딴 전체 주민의 41퍼센트 내지 43퍼센트는 다약족이며, 2.75퍼센트가 마두라족 이주민들이라고 했다. 이들 두 종족 간의 갈등은 상대 측 여성을 비하하거나 희롱하는 등 여성문제로 촉발되는 경우가 가장 많으며, 금전과 토지에 관련된 갈등, 갈수기에 수원(水源)에 대한 주도권을 둘러싼 다툼이 주요 요인들이었다. 이들 두 종족 간의 갈등은 사소한 문제로 시작되어도 종족 간의 대규모 분쟁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때때로 대량살육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바딱 족과 마찬가지로 마두라 족은 상대방의 기분이나 주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직설적으로 밝힌다. 이러한 성향은 쟈바족이나 순다족과는 정반대다. 자존심이 강한 마두라족은 명예를 존중한다. 마두라 속담에 ‘앙고안 뽀드야 똘랑 에뜨방 뽀드야 마따’라는 것이 있다. Ango’an poteya tolang etebang poteya mata. 이를 인도네시아어 표준말로 고쳐 해석해 보면 ‘모욕을 당하느니 보다 죽는 편이 낫다’다. Lebih baik berputih tulang (mati) daripada berputih mata (menanggung malu). 마두라 사람들에게 명예나 자존심은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가족과 종족사회 전체에게 적용된다. 대중 앞에서 수치스러운 일로 모욕을 당한다는 것은 마두라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심한 경우, 상대방의 목을 베는 ‘피의 보복’을 주저하지 않는다. 마두라족 성인 남자는 모두 쯜루릿(celurit)이라 칭하는 초승달 형태를 한 예리한 다용도 낫을 지니고 다닌다. 이들은 베어낸 상대방의 목을 숨기지 않고 긴 장대 끝에 꽂아 동네 어귀에 세워놓는다. 이를 쨔록(carok)이라 한다. 거침없이 쨔록을 행하는 마두라인들이 야만성을 지닌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과 신뢰를 쌓으면 매우 돈독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수마트라 바딱족도 마찬가지다.

KERAPAN SAPI.jpeg▲ 까라반 사삐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척박한 마두라 섬의 집단 농경생활을 통해서 이곳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까라빤 사삐(karapan sapi)라는 황소 경주를 즐기고 있다. 경주(競走)를 의미하는 까라빤은 마두라어의 가라빤(garapan)에서 나왔는데, ‘경작(耕作)하다’라는 뜻이다. 마두라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땅이 척박하여 황소가 필수적이었다. 당연하게 황소는 마두라족에게 재산 목록 1호에 해당된다. 경쟁하는 놀이문화를 즐겨온 이들에게 수확의 기쁨과 남성의 강인한 체력을 상징하는 까라빤 사삐가 정착된 것이다. 이 경기는 한 쌍의 황소가 주인을 태운 바퀴 없는 수레를 끌고 달리는 것인데, 두 팀이 한꺼번에 달려서 승부를 가름한다. 주행거리는 100미터이며 대개 10초 만에 승부가 난다. 때때로 경기의 재미를 위하여 1분 이상 걸리게 하는 경우도 있다. 추수를 끝낸 8월부터 9월 사이에 전국적으로 열리고, 최종 선발대회는 10월에 있다.

 사람들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추우면 두텁게 입고 보드카를 마시며, 더우면 얇게 입고 대나무를 엮어 얼기설기 집을 지어도 된다. 강성국가들 사이에 끼면, 쇠멸 (衰滅)하거나 강소국이 된다. 이스라엘과 네덜란드가 그렇고, 싱가포르도 같은 경우다. 수십 년을 싸워 독립국가에 준하는 자치권을 쟁취한 아쩨(Aceh)족과 바짝 붙어있는 북부 수마트라의 바딱족이 거친 종족으로 정평이 나 있는 까닭이다. 쟈카르타 인근 공단의 십장(什長)들 중에는 바딱 출신들이 많다. 마두라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쟈바를 지배하는 거대한 쟈바 족이 버티고 있어 쟈바로의 진입은 일찍 포기하였고, 먹을 것이 부족하여 밀려드는 강성 이주민들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뜨거운 태양 아래 소금밭을 일구고, 거친 바닷바람과 싸웠다. 그래서 거칠고 강인한 종족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똘똘 뭉쳐서 ‘쯜루릿’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 나온 것이다.

 세월은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든다. 마두라족의 강성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쟈바와 마두라가 연결되어 이제 마두라 섬은 더 이상 쟈바 동북부의 거친 섬으로 남지 못하게 됐다. 인도네시아 제2의 항구도시 수라바야와 마두라 섬의 방깔란(Bangkalan)을 연결하는 수라마두(Suramadu) 연륙교(連陸橋)가 건설된 것이다. 쟈카르타 정부와 중국 건설업체의 합작으로 2003년 8월에 착공하여 2009년 6월에 완공하였다. 총 연장 5.4킬로미터 폭 30미터이며, 4억 5000만 달러의 건설비가 소요되었다. 통행료가 4륜차 기준 3만 루피아 (2400 원), 2륜 오토바이는 3천 루피아로 시작하였는데, 2016년 초 죠코위 대통령의 수라마두 방문을 계기로 요금의 50퍼센트가 할인되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교류’하시라는 뜻이다. 거친 마두라족의 강성도 조금씩 풀릴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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