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눈 감고 더듬어 올라간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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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고 더듬어 올라간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만남

기사입력 2016.12.05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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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윤 교수.jpg▲ 양승윤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지난 10월 29일 자카르타 인도네시아 헤리티지 소사이어티 도서관에서 교민들을 대상으로 '한국과 인도네시아 관계'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데일리인도네시아)
 

글: 양승윤 한국외대 명예교수

   혜초 스님과 스리비자야 왕국

   700년 넘게 장수한 인도네시아 스리비자야(Srivijaya)왕국(650-1377)은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중심부였다. 이 왕국은 수마트라 남부 빨렘방(Palembang)을 중심으로 말라카(Malacca) 해협 양안(兩岸)의 전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태국 남부와 미얀마와 쟈바에 걸쳐서 광대한 통치권역을 형성하며 크게 발흥했던 불교왕국이었다. 말라카 해협의 전략적 요충지를 모두 차지했던 스리비자야는 8세기 말에 이미 400-600톤 규모의 거대한 선박을 건조하여 인도와 중국을 왕래하는 정기 무역항로를 개척했었다. 이 왕국의 통치자는 불교도였으며, 중국과의 교역품목 중에는 비단과 도자기 이외에도 사찰에서 사용하는 각종 불교용품이 대량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당나라 고승 이징(義淨, 636-713)의 스리비자야왕국 여행기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과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스리비자야에서 1,000명이 넘는 승려를 발견했으며, 여러 나라에서 온 장사꾼들이 자주 어울리고 있더라고 했다. 이징은 인도로 가는 학승(學僧)들은 한두 해쯤 스리비자야에 머무르며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추천하고 있다. 그는 672년 37세 때 광저우(廣州)를 떠나 바닷길로 스리비자야의 수도 빨렘방을 거쳐 인도에 도착하여 범어를 배우고 범본(梵本) 불경을 얻어 694년 당나라로 돌아왔다. 이징은 12년에 걸친 인도와 당과 인도 간의 바닷길에서 만난 남해제국의 여행기를 통해서 인도와 스리비자야 왕국 등 여러 나라의 불교 상황과 승려들의 생활상, 그리고 일반 서민들의 사회와 풍물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이징은 측천무후(則天武后)로부터 삼장(三藏)이라는 불계 최고의 칭호를 하사 받은 당대 으뜸의 고승이었다. 

   신라 스님 혜초(惠超)(704-787)는 열여섯의 나이에 당나라에 건너가 금강지(金剛智)라는 중국 이름을 쓰고 있던 천축국(天竺國) 인도의 밀교승 바즈라보디(Vajrabodhi)의 가르침을 받았다. 혜초 스님이 20세가 되었을 때, 스승의 권유로 천축국 인도로 떠나게 되었다. 혜초는 723년 광저우를 떠나 이징의 여행길을 더듬어 바닷길로 인도에 닿아 다섯 천축국을 섭렵하고, 중앙아시아와 일부 러시아 지역을 거친 후 일찍이 세계의 지붕으로 알려졌던 파미르(Pamir) 고원을 넘고 둔황(敦煌)을 지나 727년 만 4년 만에 장안(長安)으로 돌아 왔다. 실로 치열한 구도(求道) 여행이었다. 그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있다.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aul E. Pelliot)가 둔황 막고굴(莫高窟)에서 발견했을 당시 혜초의 기행문은 아홉 장의 황마지(黃麻紙)를 이어 붙인 두루마리였다. 총 길이 358센티, 너비 28.5센티의 황마지 두루마리는 앞과 뒷부분이 많이 잘려나간 나머지로, 마모되어 확인할 수 없는 글자까지 합치면 6,300여 자가 쓰여 있었다. 그러나 여러 관련 자료로부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전체 분량은 약 1만 1,300자로 추산된다고 한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의 <동방견문록>이나 이븐바투타(Ibn Battuta: 1304-1368)의 여행기 <리흘라(Rihla)> 보다 5세기를 앞선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출발지로부터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방향과 소요 시일, 경유지에서 만나는 왕국의 도읍지와 규모, 통치상황, 주변 왕국과의 관계, 지형과 기후, 음식과 각종 특산물, 의상과 풍습, 주민들의 언어생활, 불교의 발전 정도와 기타 종교 상황 등을 순차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징과 같은 바닷길을 택한 혜초 스님은 사전에 이징의 스리비자야 왕국 여행기를 거듭거듭 독파하였을 것이고, 얼마간 스리비자야 왕국에 체류했을 것이며, 잘려 나간 왕오천축국전 앞부분에 이 왕국에 관한 성실한 사실적 묘사를 많이 남겼을 것이다. 신라사람 혜초 스님, 그는 인도네시아 불교왕국 스리비자야를 방문한 최초의 한국인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바닷길 비단길과 고려인삼 꼬리솜

   고려삼은 고려시대(918-1392)에 중국 남송(南宋)(1127-1279)을 거쳐 바다의 실크로드(Silk Voyage)를 따라 동남아에 전해졌다. 우리의 국명 ‘코리아(Korea)’도 이 때 고려삼과 함께 광활한 바깥 세상에 알려졌을 것이다. 베트남에서 인삼은 년썸(nhan sam)이라하며, 년썸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베트남어 대사전에 고려(한국)를 찾으면, 예문으로 썸 까오 리(sam Cao Ly)가 나오는데, 고려인삼이라는 뜻이다. 하노이의 원로들이 생생하게 기억하는 즈어우 찜 껌 chim cam sam)이라는 술이 있다. 직역하면, ‘인삼밭을 밟았던 새의 발목을 잘라 담근 술’이다. 이 새는 아마도 한반도까지 날아와 인삼밭에 앉았다가 베트남으로 되돌아온 철새로 여겨지는데, 그 새를 잡아 발목으로 술을 담갔다고 한다. 요즘은 흔치 않아 보호종으로 관리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수도 하노이를 중심으로 ‘새 발목 술’이 큰 인기였다고 한다. 

   베트남뿐만이 아니라 동남아 어디에서나 고려삼의 신비한 효능에 관한 구전(口傳)을 찾아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꼬리솜(Korisom)이라고 하며, 태국에서는 ‘까올리 쏘옴’이라고 한다. 꼬리나 까올리는 고려 또는 코리아라는 뜻이다. 말레이시아에서도 고려삼에 인접한 발음인 꼴레슴(Kolaeseum)이라고 한다. 중부 베트남 후에(Hue)에서 만난 한 촌노의 년썸(인삼)에 관한 구전은 매우 흥미로웠다. 흔한 성씨인 응웬(Nguyen) 노인에 의하면, 다 죽어가는 100살 노인이라도 년썸 한 뿌리를 구해다 인중 위에 올려놓으면, 먼 곳에 있는 자식들이 다 모여서 임종을 마칠 때까지 최소한 사흘 동안은 살아 숨을 쉰다는 것이었다.

   고려는 대외무역에 힘썼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19세기 인구가 한창일 때 20만 명이었다. 이 보다 몇 백 년 전 고려 개경은 인구가 7만에 이른 국제도시였다. “한창 때의 개경은 고래 등 같은 기와지붕이 처마를 이었고 멀리 동남아와 아라비아에서 온 장사치까지 거리에서 목청을 높였다”고 했다(조선일보, 2012. 1. 14). 고려는 무역왕국이었고, 그 중심지는 개경을 지나는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碧瀾渡)였다. 국제 무역항구 벽란도는 남송과 밀접한 교역관계를 통한 상호이익을 나누었다. 송나라는 전후기 왕조로 구분하며, 북송(北宋)으로 일컬어지며 대륙에서 밀렸던 전기와 달리 후기 남송은 남양(南洋)으로 세력을 펼쳤다. 이 시기는 스리비자야 왕조를 지나 쟈바의 마쟈빠힛(Majapahit: 1293-1527)과 말라카 해협의 말라카(Malaka: 1402-1511) 왕조의 번영기로 바다의 실크로드 전성기와 일치한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 10대 무역대국이며, 인도네시아는 한국의 10대 교역국가의 하나이다. 당연하게 많은 교역품이 있다. 두 나라의 초기 교역품의 하나로 고려삼이 포함되었을 것이 자명하다.
   
   인도네시아 독립 영웅 한국인 양칠성

   서부자바주 가룻 지역에 있는 뗀조라야 영웅묘지에 한국인 양칠성(梁七星)이 묻혀있다. 1919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난 그는 1942년 일본에 강제 징집되어 일본 남방군 소속으로 1945년까지 쟈바에서 연합군 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복무했다. 194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 해방 후 야나가와 시치세이(양칠성의 일본 이름)는 일본군과 함께 귀국 길에 오르지 않았다. 현지 여성과 결혼하여 이미 자녀가 있었고, 귀국 시 연합군포로감시원 경력 때문에 전범으로 처벌될 것을 우려해서였을 것이다. 일본군 부대를 이탈하여 밀림으로 잠입한 양칠성은 독립투쟁을 펼치고 있던 인도네시아 게릴라 부대에 합류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 무장해제 명목으로 인도네시아에 재상륙한 네덜란드군은 과거 350년 간 식민통치했던 이 나라를 다시 자국의 위성국가로 만들려는 고도의 책략을 펼쳤다. 이를 간파한 인도네시아 젊은이들은 일본군이 버리고 간 빈약한 무기를 모아 게릴라부대를 급조하고 네덜란드 정예부대를 상대로 처절한 독립항쟁(1945-1949)을 벌였다. 

   양칠성은 빵에란 빠빡(Pangern Papak)부대에 소속되었다. ‘빠빡 왕자부대’라는 뜻이다. 이 게릴라부대는 가룻(Garut) 인근 따식말라야(Tasikmalaya)의 갈룽궁(Galuggung)산에 본대를 두고 중부 쟈바를 중심으로 네덜란드군에 대항했다. 반둥(Bandung)과 죡쟈카르타(Yogyakarta) 간을 철도로 이동 중인 병력을 공격하고 군수물자를 파괴하였으며, 네덜란드 군부대를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기도 하였다. 꼬사시(Kosasih) 소령이 지휘한 빠빡부대는 ‘반둥 불바다 전투’(Bandung Lautan Api)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양칠성은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이 부대에서 꼬마루딘(Komarudin)이라는 인도네시아식 이름으로 활약하였다. 꼬마루딘은 1948년 11월 갈룽궁 밀림에서 네덜란드군 공격을 모의하던 중 네덜란드군에 생포된 후 1949년 8월 10일 두 명의 일본 패잔병 출신 동료 게릴라와 함께 처형되었다.    

   꼬마루딘 양칠성은 지난 1975년 인도네시아 독립영웅으로 되살아났다. 빠빡부대에서 꼬마루딘과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동료가 인도네시아군 장성이 된 후, 꼬마루딘의 게릴라 행적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1976년 11월 꼬마루딘과 두 명의 일본인 게릴라는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외국인독립영웅으로 추서되어, 1976년 11월 가룻의 영웅묘지로 이장되었다. 이때까지도 한국인 양칠성은 꼬마루딘 야나가와 시치세이였다.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인 출신 전범의 명예회복과 보상운동을 해 온 일본의 역사학자 우쓰미 아이꼬(內海愛子)가 일본군 출신 인도네시아 독립영웅 소식을 접하고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꼬마루딘은 한국인임이 밝혀졌다. 1995년 8월 국내의 시민운동 관계자와 외교당국의 노력으로 양칠성은 한국인으로 돌아왔다. 
   
   김종필-수카르노의 도쿄 회동과 최계월

   1962년 11월 12일 일본 외무성에서 있었던 한국의 초대 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상 오히라(大平) 회담에서 한일외교사의 중요한 분수령인 ‘김-오히라 메모’를 작성하게 된다. 같은 날 김종필은 도쿄 시내 제국호텔로 수카르노(Sukarno)를 방문하여 한 시간가량 요담했다. 한국-인도네시아 당국자 간 최초의 회동이었다. 김 부장은 수카르노의 방한을 요청하였고, 수카르노도 김 부장을 인도네시아로 초청하였다. 이 회동에서 수카르노는 1963년 10월 이전에 방한할 기회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 제3세계 비동맹그룹의 중심인물의 한 사람이었던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는 반미(反美) 최선봉에서 북한의 김일성과 친밀했으며, 한국을 미국의 위성국가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쿄 회동에서 수카르노는 한국의 비동맹회의 참가희망을 긍정적인 평가하면서 한국도 인도네시아 자원개발에 참가해 줄 것과 경제개발에 필요한 원자재를 자국에서 구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김종필-수카르노 회동을 주선한 인물은 최계월(1919-2015)이었다. 경남 합천 출신인 최계월은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한 후 전쟁을 맞아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전후 일본에서 명치유신의 일등공신이었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손자 사카모토 나오미치(坂本直道)와 우연한 인연으로 가깝게 교류하고 있었다. 최계월은 사카모토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사토(佐藤)와 후쿠다(福田) 등 일본 자민당의 거물급 정치인들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그는 전후 일본을 자주 방문하던 네덜란드령 파푸아(당시)의 민족지도자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이들이 네덜란드령 파푸아의 장래를 놓고 독립국가로 향해 고난의 행진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인도네시아를 택하여 시간을 가지고 힘을 모을 것인가를 놓고 갑론을박할 때 최계월은 인도네시아와 합병하도록 설득하여 수카르노의 환심을 샀다. 일본 또한 최계월의 중재로 인도네시아에 대한 전쟁보상금의 부담을 줄이면서 큰 어려움 없이 수교합의에 이를 수 있었다. 김종필-수카르노 도쿄 회동이 성사된 배경이었다. 

   최계월은 5·16 군사혁명 이후 귀국하여 해외 자원개발에 힘썼다. 1963년 남방개발을 창업하고, 1968년 한국의 해외투자 1호로 기록된 인도네시아 칼리만딴(Kalimantan)의 산림개발에 뛰어들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주종 수출품의 하나는 칼리만딴 산(産) 원목으로 만든 합판이었다. 1981년 최계월은 인도네시아 쟈바 동북부 마두라(Madura)의 서(西)마두라 유전개발에 참여하여 다시 해외원유개발 1호의 깃발을 들어 올렸다. 자원대국 인도네시아가 한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최계월이라는 탐험적 한국인이 맨 처음 칼리만딴 밀림에서 원목을 베어내고 쟈바 해상(海床)을 탐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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