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승윤 한국외대 명예교수(동남아학)
동남아 고대국가의 구조는 만다라(曼陀羅) 형태였다. 해양부 동남아에서는 만다라를 만달라(Mandala)로 칭하는데, 해양부 동남아에서 사람 이름으로도 많이 쓰인다. 불교 용어로 만다라는 중생(衆生)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덕(德)을 나타내어 둘러앉은 모양의 그림으로 그려진 군신상(群神像)을 말한다. 동남아 고대국가의 통치구조는 지배자를 정점(頂点)으로 한 피라미드 형태가 아니라 지배자가 중앙에 서는 동심원(同心圓) 형태, 즉 만달라 형태였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번져나가는 것처럼 처음에는 선명하지만 파문은 점차로 약해진다. 중심은 있고 변경이나 울타리가 없는 것과 같다.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세금과 노역을 바친다. 7세기에 이르러 동남아에 등장한 제국(帝國) 형태의 만달라는 이전 시대의 만다라와 달리 보다 세련된 모습을 갖추고 왕권의 중앙집중화가 이루어졌다. 수마트라의 빨렘방(Palembang)을 중심으로 7세기부터 13세기까지 장장 7세기에 걸쳐 장수한 스리비자야(Srivijaya)왕국과 캄보디아 톤레쌉(Tonle Sap) 호수 인근에서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번영한 앙코르(Angkor)왕국이 각각 해양부와 대륙부 동남아를 대표하는 제국 형태의 만달라 왕국이었다.
스리비자야 왕국은 7세기 말부터 600년이 넘게 말라카(Malacca) 해협을 중심으로 전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태국 남부, 쟈바 일부지역에 걸쳐서 크게 발흥했던 불교왕국이었다. 이 왕국은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을 많이 남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사료(史料)를 통한 분석에는 미치지 못하나, 고고학자들은 이 거대한 고대국가의 생존방식이 농업에 의하지 않고 해상무역에 치중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이 거대한 왕국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 프랑스 학자(G. Coedes)에 의해서 복원되었다. 수마트라 빨렘방(Palembang)이 스리비자야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발굴한 산스크리트(Sanskrit)어로 된 몇 개의 비문을 통하여 스리비자야는 강력한 해상왕국이었음이 밝혀졌다.
말라카 해협의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했던 스리비자야 왕국은 8세기 말에 이미 400-600톤 규모의 거대한 선박을 건조하여 인도와 중국을 왕래하는 정기항로를 개척하였다. 이 왕국의 통치자는 불교도였으며, 중국과의 교역품목 중에는 비단과 도자기 이외에도 불교 사찰에서 사용하는 각종 불교용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 승려 이징(義淨)의 스리비자야 왕국 여행기(大唐西域求法高僧傳)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스리비자야에서 1,000명이 넘는 승려를 발견했고, 여러 나라에서 온 무역업자들이 자주 회합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징은 인도로 가는 승려들은 한두 해쯤 스리비자야에 머무르며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추천하고 있다. 그가 중국으로 귀환할 때 믈라유(Melayu)는 이미 스리비자야의 속국이었다고 했다. 믈라유는 오늘날의 말레이 반도를 말한다.
▲ 보로부두르 사원 전경. (데일리인도네시아 자료사진)
스리비자야 왕국은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사이의 말라카 해협과 수마트라와 쟈바 사이의 순다(Sunda) 해협의 모든 주요 항로를 장악했으나, 내륙의 농업 지역을 충분하게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식량을 중부 쟈바로부터 공급 받아야 했고, 일부는 스리비자야의 영역인 말레이 반도 남단의 죠호르(Johor)와 수마트라 북단의 아쩨(Aceh)에서 조달하였다. 8세기 초기 이래로 중부 쟈바에는 힌두문화를 배경으로 한 산자야(Sanjaya) 왕국이 있었고, 스리비자야에 식량을 공급했으나 점차로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관계에 돌입하였다. 이로 인해서 두 왕국은 한동안 긴장 관계에 있었다. 스리비자야 왕국의 멸망에 관한 사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중부 쟈바와 죠호르-아쩨 간에 동맹이 이루어졌고, 이들 삼각 동맹으로 스리비자야에 식량 공급을 점차 축소하여 스리비자야의 목을 조였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스리비자야는 이처럼 항상 식량 공급원에 신경을 썼다. 이 왕국이 산자야와 쟁패하는 동안 쟈바 동북부에서 발흥한 불교문화 배경의 사일렌드라(Sailendra) 왕국이 중동부 쟈바를 지배하에 두고, 같은 불교 왕국인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인도네시아 군도의 불교문화는 이 때 만개하였다. 사일렌드라가 산자야를 대신하여 스리비자야의 새로운 식량 공급원이 되었다. 현존하는 주요 인류문화유산의 하나이자 공식적인 세계 최대의 불교 유물인 보로부두르(Borobudur) 불교 사원도 사일렌드라 왕국의 전성기에 축조되었다. 보로부두르는 산스크리트와 발리 문자의 합성어로 ‘언덕 위의 승방(僧房)’이라는 뜻이다.
힌두 산자야 왕국의 후손들도 사일렌드라 왕국의 외곽지대에서 지속적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850년 경 산자야 왕(라카이 삐카탄)과 사일렌드라 공주 간의 결혼동맹으로 중부 쟈바의 통제권이 다시 산자야 왕국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라카이 삐카탄 왕은 자신의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서 보로부두르에 견줄 수 있는 힌두사원을 남기고 싶었다. 보로부두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축조된 쁘람바난(Prambanan) 힌두사원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안고 세워졌다. 세계적인 힌두 유적지의 하나로 알려진 이 미려(美麗)한 힌두사원은 오늘날 중남부 쟈바의 죡쟈카르타(Yogyakarta)에 남아 있다. 쁘람바난 사원이 세워진 동네 이름이 쁘람바난이다. 이 사원이 축조될 당시 쁘람바난은 규모는 작지만 부유하고 화려한 왕국이었을 것이다.
산자야 왕국의 번영에 따라 중부 쟈바는 한동안 힌두왕국에 의해서 성공적으로 통치되었다. 동부 쟈바로 세력권을 확대한 힌두왕국은 10세기 후반에 전성기를 맞아 990-991년 사이에 스리비자야 왕국을 공격하여 한 때 왕국의 중심부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25년 후 스리비자야는 막강한 해군력을 동원하여 쟈바의 힌두왕국의 위대한 군주 다르마왕사(Dharmawangsa)를 제거한 후, 그의 영토를 수많은 봉토(封土)로 분할하였다. 다르마왕사의 조카 이이르랑가(Airlangga)가 다시 왕국을 회복하기까지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스리비자야 왕국의 군대를 물리치고 1019년 다르마왕사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중부와 서부 쟈바에는 오늘날까지 거리와 호텔 이름으로 다르마왕사가 많이 남아 있다.
아이르랑가는 쟈바 힌두왕국의 구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하고 번영을 되찾았다. 아이르랑가 통치시기에 수많은 인도 고전이 산스크리트어로부터 쟈바 고어로 번역되고, 쟈바의 토착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 시기에 쟈바의 전 지역은 이전의 왕국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번영하였다. 동부 쟈바를 계승한 통치자들은 내륙의 농업을 크게 발전시켰고, 동시에 이익을 많이 남길 수 있는 해상무역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1222년 쟈바의 새로운 강자 싱하사리(Singhasari) 왕국이 동부 쟈바 말랑(Malang)에 세워졌다. 싱하사리 왕국은 1275년과 1291년 두 차례에 걸쳐서 스리비자야의 대군이 침공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였으며, 계속해서 증가일로에 있던 쟈바 주변의 해상무역을 엄중한 자신의 통제 하에 두었다. 이즈음 몽골의 쿠빌라이 칸(Khubilai Khan)이 1293년 강력한 함대를 앞세워 싱하사리 왕국의 정복에 나서 쟈바에 등장하고 있다. 경쟁 상대가 바뀌고 쟈바에서 후원 세력이 사라진 스리비자야 왕국은 주변으로부터 식량공급까지 원활하지 못하여 국력이 서서히 소진(消盡)되었다.
8세기에서 14세기에 이르는 동안 동남아 고대왕국들은 수많은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을 축조하였다. 이 중에서도 앙코르 와트(Angkor Wat), 보로부두르, 쁘람바난, 버강(Pagan) 등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앙코르 와트는 오늘날 캄보디아에, 보로부두르와 쁘람바난은 인도네시아 쟈바에, 버강은 미얀마에 있다. 이들 동남아의 고대국가들은 모두 중국에 조공사절이나 교역사절을 보냈고, 중국왕실은 이러한 사절단의 왕래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중국 사료에 따르면, 초기 동남아 교역국가로 푸난(Funan)이 등장한다. 푸난은 부남(扶南)의 중국식 명칭인데, 6세기까지 중국에 조공사절단을 보냈다. 그 후 푸난은 쩐라(Zenla)로 대체되는데, 중국식 명칭은 진랍(眞臘)이었다. 이 쩐라 왕국이 크메르(Khmer)족이 메콩(Mekong)강 하류의 거대한 천연 호수인 똔레쌉(Tonle Sap) 인근에 세운 앙코르 왕국이었다.
▲ 쁘람바난 힌두사원 (데일리인도네시아 자료사진)
8세기 말(연대 미상)부터 834년경까지 쩐라를 통치한 자야바르만 2세(Jayavarman II)는 스리비자야 영향 하에 있던 쟈바 왕국들의 간섭을 벗어나 똔레쌉 인근 지역을 정복하여 통치영역을 크게 확대하였다. 특히, 관개를 통한 인공적인 벼(禾) 재배에 성공함으로써 식량 확보에 획기적인 진전을 보아 왕권 확립을 다질 수 있었다. 자야바르만 2세는 똔레쌉 북부에 왕도를 정하고, 802년 자신이 데와라쟈(dewaraja)로 즉위하였다. 데와라쟈는 데와(신)와 라쟈(왕)의 합성어로 신왕(神王)이라는 뜻이다. 자야바르만은 자신이 현신의 왕이자 힌두신 시바(Siva)와 동일한 신앙의 대상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자야바르만 2세가 기초를 다진 앙코르는 왕국의 전성기에 오늘날의 캄보디아를 중심으로 베트남과 미얀마의 일부까지 포함되는 대륙부 동남아의 최대 왕국이었다. 이 기간 동안 크메르족의 지배자들은 계속해서 사제와 승려와 예술가들과 수많은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앙코르 왕국을 건설하였다. 여러 세대에 걸쳐서 앙코르는 똔레쌉 인근의 여러 지역에 사원, 참배 공간, 승방, 일반 가옥 등 다양한 용도의 건축물들을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인공 저수지도 많이 조성되었는데, 관개뿐만 아니라 주변의 경관까지 고려한 역사였다.
앙코르 왕국의 건축물과 조형물들은 대개 수세기에 걸쳐서 건설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예술적 스타일이 혼합되어 있다. 야소바르만(Yasovarman)왕은 재위 기간(889-910) 중 똔레쌉 북부로 왕도를 옮겨 본격적으로 앙코르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프놈 바켕(Phnom Bakheng) 사원을 세워 이곳을 힌두 신앙의 중심인 성산(聖山) 메루(Meru)산으로 삼았다. 메루산은 힌두 유적지 마다 빠짐없이 발견된다. 중남부 쟈바의 머라삐(Merapi) 산(2,930미터)도, 발리 최고봉 아궁(Agung) 산(3,142미터)도 메루산이다. 머라삐는 ‘불타는(berapi) 메루산(Meru)’이라는 뜻을 가진 두 단어의 합성어다. 프놈 바켕이 내려다보는 앙코르는 왕국과 왕도(王都)와 사원을 비롯한 모든 백성과 건축물들을 포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앙코르(angkor)는 산스크리트어의 너가라(negara)가 어원이다. 너가라는 말레이 문화권에서 오늘날까지 ‘국가(國家)’라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앙코르 왕국과 앙코르 와트(Angkor Wat)는 동의어가 아니다. 앙코르 와트는 앙코르 사원이라는 뜻이다.
중앙 탑 높이가 60미터에 이르는 앙코르 와트 사원은 수르야바르만 2세(Suryavarman II)의 재위 기간(1113-1145) 중 세워 힌두 신앙의 ‘번영의 신’ 비쉬누(Vishnu)에게 봉헌한 것이다. 47미터 높이의 쁘람바난 사원의 중앙 탑은 ‘파괴의 신’ 시바(Siva)에게 바친 것인데, 이에 비하면 앙코르 와트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앙코르 와트는 사원 자체로 크메르족들의 왕국과 우주를 모두 시현(示顯)한 것이다. 사원의 조각과 부조에 나타난 이야기는 고대 인도의 서사시인 라마야나(Ramayana)에 등장하는 비쉬누의 화신인 라마(Rama) 왕자와 후일 왕비가 된 신따(Sinta)의 고난과 영광의 장엄한 일생을 묘사한 것이며, 라마야나를 이은 마하바라따(Mahabarata)에 등장하는 여러 장면과 당시 왕궁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앙코르 와트가 완공된 당시에 모든 탑은 황금빛으로 채색하고 나머지 외관은 흰색으로 치장하여 그 호화로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앙코르 와트가 수르야바르만 2세의 무덤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들은 태양력(인도력) 관측소일 수도 있다고 했는데, 인도력(Saka)의 새해 첫날인 하지(夏至)에 앙코르 와트의 정중앙으로 태양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수르야바르만 2세가 사거(1145년)하자 앙코르 왕국은 급격하게 침체기로 접어 들었다. 관개시설이 막혀 물이 썩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말라리아가 창궐하였다. 1177-1178년에 동쪽의 참(Cham)족이 앙코르를 공격하여 무방비한 왕국을 초토화시켰다. 참족의 공세가 있은 3년 후인 1181년 자야바르만 7세 (Jayavarman VII)가 등장하여 외세를 몰아내고 왕국의 권위를 되찾았다. 그는 이제까지의 통치자들과 다르게 대승불교의 신봉자였는데, 자신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서 바욘(Bayon) 사원을 축조하였다. 이 사원은 네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인간의 얼굴로 치장된 여러 개의 탑으로 구성되었다. 바욘 사원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힌두신앙의 ‘창조의 신’ 브라흐마(Brahma)의 현신(現神)화 일수도 있고, 불교의 관음보살(觀音菩薩)상 일수도 있으며, 앙코르 왕국의 모든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야바르만 7세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앙코르 왕국을 건설했던 마지막 왕이었다.
앙코르 왕국의 번영과 영화는 지속되지 않았다. 똔레쌉 호수 주변의 광활한 농경지는 충분한 식량원이 되어 스리비자야 무역왕국의 경우와 달리 식량부족이 왕국 침체의 원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크메르족과 군소 고산족들과 주변국가에서 잡아온 수많은 전쟁포로들이 똔레쌉 주변의 농경지에 군거하며 식량을 생산하고 앙코르 왕국 건설에 동원되었다. 왕국건설 사업은 전쟁에 의존했으나, 전쟁은 항상 승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자야바르만 7세 왕 이후의 앙코르 왕국은 동쪽과 서쪽에서 참족과 싸얌(Siam)족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머지않아 북쪽의 비엣(Viet)족이 공격에 가담함으로서 대륙부 동남아 최대의 왕국이자 찬란한 앙코르 제국은 주변 국가의 협공으로 점차 국력이 쇠진하기 시작하였다. 때를 맞추어 싸얌(태국)족이 일어나 12세기경부터 앙코르 왕국에 대한 적극 공세에 나섰다. 이들은 수코타이(Sukhothai)왕국을 세워 앙코르 왕국의 모든 것을 약탈해 갔다. 왕실의 수많은 학자들과 장인(匠人)들도 주요 대상이었다. 오늘날의 태국 영토로 영역을 확장하고 수코타이를 전성기로 이끈 람깜행(Ramkhamhaeng) 대왕의 태국 문자 창제도 앙코르 문자 위에 세워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