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김길녀] 신들의 거처에서 들려오는 오래된 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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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녀] 신들의 거처에서 들려오는 오래된 불의 노래

기사입력 2016.07.29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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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녀 시인이 만난 인도네시아]


신들의 거처에서 들려오는 오래된 불의 노래


  -동부 자와티무르, 브로모 화산 (Jawa Timur, Gunung Api Bromo) 



오랜만에 긴 여행 준비를 한다.

새로운 필기구와 가벼운 종이 일기장을 사고

카메라를 점검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당신의 사진을 챙긴다.

표지가 닳아가는 시집 몇 권은 여행 중에 

만나는 그들에게 주고 올 것이다.

큰 가방을 열어둔 채

공항 대합실을 서성이는 마음도

가방 안쪽에 잠시, 접어둔다.


-온기와 서늘함의 행간, 칼데라로 가다


인니의 ‘또바 호수와 브로모 화산을 만나고 나면

시집 두 권은 너끈히 묶을 수 있을 거야’

당신이 전해준 그 말이 우리의 겨울 즈음에 생각났다.

스스로에게 다짐과 맹세를 선언하기 좋은 새해가

함께하는 겨울.


생애 처음 맞이하는 따뜻한 겨울.

오랫동안 온몸에 새겨진 겨울 유전자는

자연스럽게 백색계절을 그립게 했다.

겨울 그림과 영화와 노래와 시와 소설을...

집 앞 공원 울창한 숲에 무겁게 쏟아지는

폭우도 폭설처럼 느껴졌다.

온통 하양만을 찾는 일에 열중했다.


인니에서 일출이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곳.

그 귀한 일출을 보기도 쉽지 않은 곳.

불의 신이 살고 있다는 활화산에 얽힌 전설.

해발 2,329m에 위치한 원추형 활화산.

일 년 내내 분화구에서 가스분출과 수증기를 내뿜으며

자주, 사람들의 접근을 통제하는 곳.

열대나라인 인니에서 강한 추위를 느낄 수 있다는

말도 겨울을 그리워하던 내게는 유혹적으로 다가 왔다.


포근한 겨울이 주는 낯섦 속에서

창고 방에 쌓여 있는 박스를 뒤져 겨울옷과 신발을 꺼냈다.



-라벤더 꽃다발에 띄워 보낸 ‘야드냐 카사다’ 경건한 의식  


자카르타 출발 후 밤 11시에 도착한 수라바야 공항.

신축한지 오래지 않은 공항은 넓고 깨끗하다.

공항 내 매점에는 한국산 물건들이 눈에 띄어 반가웠다.

예약된 차와 기사는 미리와 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려서 

새벽 1시쯤 화산으로 가는 마을에 도착했다.

겨울옷과 신발로 무장해도 강한 추위가 느껴진다.

모자와 장갑을 구입하고 잠시의 쪽잠을 선택했다.

일출 장소까지는 지프로 간다.

새벽 4시에 일출 전망대 아래 도착하니

미리 와 있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한기와 허기를 인니라면과 블랙커피로 달랜다.

우리를 비롯한 외국인들이 많다.

전망대는 낮은 동산 같다.

추위에도 키 작은 나무엔 단풍이 들고 빨강 꽃도 피어있다. 

새벽 5시30분 기다리던 태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의 환호와 카메라 셔터 터지는 소리가

활화산과 사화산에 울려 퍼진다.

이곳 마을 주민들은 저 화산들을 신들의 거처로 여긴다는데

일출 시간에 들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신들에겐

지상에서 들려주는 아름다운 노래이기를......

그 순간에 찍힌 사진 속 모습에는 복잡한

기도가 스며있는 듯 경건함마저 느껴진다.

전망대에서 먼 듯 가깝게 보이는 칼데라 주변은

오래전 사북에서 보았던 검은 물의 흔적이 쌓여서

만들어진 마른 고랑처럼 보인다.


이번엔 오토바이를 타고 화산 아래 도착하여

다시, 말을 타고 브로모 화산으로 간다.

길게 이어진 계단으로 가기 전에 

진보라 라벤더 꽃다발을 산다.

계단을 오르면서 보는 오른쪽 사화산 바톡의 고랑에는

키 작은 나무와 풀들이 자라고 있다.

활화산과 사화산의 공존은 신들의 활동과 휴식의

공간으로 나누어졌으리라는 따뜻한 상상을 하며

하얀 수증기를 뿜어내는 브로모와 마주한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더 가까이 분화구를 향하여

낮은 목소리로 소원을 담아서 라벤더 꽃다발을

힘껏 던진다.

전설 속의 조코 세거왕과 로로 안텡 왕비와 그들의

공주와 왕자에게 바치는 마음도 함께......


빛과 그늘의 양면성을 지닌 화산재.

화산 분화 직후에는 황산 같은 해로운 산성 물질이 많다.

그 후 토양을 재생시키는 모든 종류의 요소와 영양분으로

땅을 비옥하게 한다.

생명의 위험마저 감수하면서 화산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되는 부분이다.


계단을 내려와 말 타기를 접고 천천히 걷는다. 

광활한 사막을 연상시키는 화산 주변.

유일한 공간은 힌두교 사원이다.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는 듯......

멀리서 보면 신들의 처소만이 있을 것처럼 신비롭게 느껴진다.

화산재로 다져진 주변 땅은 지프를 타고 돌아본다.

종교적 공간 외엔 돌과 나무와 풀만이 있어서

거대한 신들의 정원처럼 평화로움만이 가득하다.

번잡한 세상으로부터 고립을 꿈꾸고 있다면

거기로부터 떠나오시라, 여기 신들의 영역에서 찾게 되는

안식을 맘껏 누리시라......


신들의 정원에서 온몸으로 얻은 휴식을 안고

새벽에 도착한 마을을 한 낮에 다시 왔다.

어둠 속에서 볼 수 없었던 마을 풍경이 예쁘다.

큰 식당 마당에는 브로모 화산을 배경으로

어울리는 빨강색 지프를 비롯한 소품들이 놓여있다.

인니의 다른 도시에선 잘 볼 수 없었던 노랑 엔젤트럼펫도 

지천으로 피어있다.

천사의 나팔과 신들의 거처가 잘 어울리는 마을이다.

늦은 점심을 먹은 후 구불구불한 산길을 내려간다.

밤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창밖으로 보이는 산비탈의 농작물들과 농부들의 모습이

철없는 이국 여자에겐 멋진 그림으로 다가온다.


인니 제2의 도시 수라바야로 돌아가는 길.

쪽잠으로 달랜 긴 하루는 낮임에도 쏟아지는 잠 덕분에

예정된 일정을 쉽게 포기하게 한다.

인니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식사는 수라바야에서 묵은 호텔의 아침이다.

온갖 종류의 풍성한 야채와 다양한 삼발 소스를 

즐길 수 있었던 시간은, 다른 일정을 포기한 아쉬움도

달랠 정도로 훌륭했다.

수라바야의 추억은 깨끗한 공항과 정갈한 호텔식이

전부였지만, 여백이 많은 짧은 시 한 편처럼 남아있다.

더불어서......

브로모 화산의 긴 여운은 잘 만들어진 단편영화 한 편이다.


심장을 향해서 자라나는 새의 부리가 있단다.

부리가 길어질수록 심장을 향한 몸짓은 빨라지고

마침내는 그 부리에 심장이 찔려 생을 마감하게 된다는

아프리카에 실존하는 새의 이야기.

사람의 끝없는 욕망에 비유되는 상징의 새.

영혼이 맑지 못한 이들에게 조용하지만 강하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있다.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실감에 빠진 이들이 

들려주던 새 이야기가 떠올랐던 며칠......


긴 여행에서 돌아와 들려준 이국 이야기를

화가친구는 그림으로

작가친구는 소설 안 문장으로

후배 시인은 시로 풀었다고 한다.

무심한 말의 껍질들이 고요 안에서 환하게 깊어지는 일.

아무것도 아닌 내가 당신 곁에서

천천히 깊어지는 까닭과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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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결에 관한 보고서


칠월 장맛비, 시퍼런 초록 골짜기를

흘러나오는 오래된 옛집

나보다 먼저 죽어간 이들의 저녁을 위하여

슬며시 문고리를 열어둔다

저물녘 강둑에 스며든 적막감이 한기로

다가와 스멀스멀

경전 속 숨은 비밀이 되어

방안 가득 똬리를 튼다

주술에 걸린 듯 배롱나무 꽃잎들

조용히 떨어져 어둠의 두터운 안부를

빗길 위에 떠내려 보낸다

검은 물기둥 궁전이 있는 사북, 뭉텅뭉텅

킬링필드의 목 잘린 해골처럼 쌓여서

산맥을 이루는 폐석탄 잔해들

굳은 능선의 부르튼 틈새마다엔

붉디붉은 물결의 시간이 깊은 주름으로

흐르다, 꽉 다문 막장 문 입구에서

녹슨 눈물의 뿌리로 환생하기도 한다

막장으로 가는 마지막 길

숨이 긴 여름햇살, 제 몸 서랍 속 비늘

모두 털어내어

새벽으로 가는 길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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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녀

김길녀 시인은 강원도 삼척 출생으로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1990년 <시와비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푸른 징조>, <키 작은 나무의 변명>등이 있다. 제13회 한국해양문학상(시)을 수상했다. 문학잡지를 만들며 에디터와 문화기획자로, 라디오방송 등등의 일로 한 시절을 보냈다. 긴 휴가를 받아 여행자로 인니의 자카르타에서 살기도 했다. 고요와 음악과 커피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기꺼이 즐기며 지낸다. 우두커니 있는 걸 좋아한다. 느낌이 좋으면 살짝, 미치는 성향이 있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에 깊이 빠져서, 그때의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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