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백단향으로 시작된 동티모르의 비극적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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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단향으로 시작된 동티모르의 비극적인 역사

기사입력 2016.06.0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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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단향.jpg▲ 사진 출처 : 위키피디어
 

글: 양승윤 한국외대 명예교수 

티모르가 외부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금만큼 귀한 가치를 지녔던 백단향(白檀香)때문이었다. 향나무 수종(樹種)의 하나인 백단향은 티모르뿐만 아니라 인도와 호주 대륙, 그리고 아프리카 동남부의 섬나라인 마다가스카르(Madagascar)에서도 자생하고 있다. 그러나 이중에서도 최고의 품종은 티모르(Timor)와 숨바(Sumba), 쏠로르(Solor) 섬 등 인도네시아 군도의 동남부 소순다열도의 동쪽 끝 쪽에 위치한 몇몇 섬에서만 발견되었다.

인도와 중국에서는 고대로부터 흑단(黑檀)이나 자단(紫檀) 같은 고급 수종의 향나무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왕실이나 고찰(古刹)에서는 각종 종교적 의례(儀禮)와 장례(葬禮)행사에 특별하게 백단향을 가루로 내어 향(香)을 피우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은은하면서도 강한 향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는 백단향은 머지않아 귀부인들의 부채와 보석상자로 만들어 지고, 왕실의 장식품으로 만들어 졌으며, 곧 왕실 사원의 각종 성물(聖物)로 만들어 지게 되었다. 이 백단향의 진귀함이 13세기에 본격적으로 열린 ‘바닷길 실크로드’(the Silk Voyage)를 경유하여 유럽 시장에 알려지게 되었다. 

바닷길 실크로드가 동서를 잇는 국제 교역로로 활기를 띠면서 백단향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백단향 교역은 바닷길 실크로드가 열리기 이전에 이미 인도네시아의 쟈바(Jawa) 해역을 중심축으로 하여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금(金) 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바닷길이 개척되고 식민지가 개발되어 국제교역이 증가하면서 이전 보다 훨씬 더 많은 백단향이 유럽 왕실로 흘러들어 갔다. 수요에 비해서 공급이 달렸으므로, 19세기로 들어서면서 소순다열도에서의 백단향 공급량이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그러나 유독 티모르에는 다른 지역과 달리 해발 표고 1300미터까지 백단향이 널리 분포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백단향의 마지막 보고(寶庫)였다. 이 백단향이 바로 바닷길 실크로드의 전성기 한 때 같은 무게의 황금과 교환되던 진귀한 교역품이었다. 그러므로 유럽인들이 백단향에 눈독을 들이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수마트라 동부 말라카 해협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스리위자야(Sriwijaya) 왕국에 관한 세데스(G. Coedes)의 연구에도 티모르산(産) 백단향은 말라카 해협을 거쳐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무역로에 실렸다고 쓰고 있다. 14세기부터 쟈바(Jawa) 사람들은 말루꾸(Maluku)군도 북쪽 끝에 위치한 떠르나떼(Ternate)와 띠도레(Tidore) 섬을 오가는 바닷길 무역로를 훤히 알고 있었다. 1511년 말라카 왕국을 점령한 포르투갈 탐험가들도 이 무역로를 찾아 나섰고, 머지않아 네덜란드가 가세하면서 점차 정규 항로로 알려지게 되었다. 17세기 초 인도네시아에 내도한 네덜란드는 떠르나떼와 띠도레로부터 말루꾸 군도의 남쪽 끝에 있는 암본(Ambon)섬까지 개척하여 거대한 향료군도(the Spice Islands)로 발전시켰다. 유럽에 향료군도로 알려진 몰루카스(Moluccas)군도가 바로 말루꾸(Maluku) 군도이며, 그 중심이 암본이었다. 네덜란드는 이곳을 향료군도의 중추로 삼아 향료무역 독점에 성공하게 된다. 

13세기의 중국 해외무역 보고서에도 향료군도 최남단인 티모르 섬은 백단향으로 둘러싸인 섬으로 묘사되고 알려져 있었다. 당시 중국에는 티모르 행 백단향 교역에 나섰던 항구가 12개소에 달했다고 했다. 한편, 14세기의 중국 문헌인 『도의침략(道義侵掠)』은 ‘티모르에는 백단향 이외의 식물이 자라지 않으며, 엄청난 양의 티모르 산(産) 백단향이 유럽의 은(銀)제품 , 철제류, 유리 제품, 다양한 옷감 등과 물물교환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백단향에 대한 소식은 16세기 초 말라카 왕국을 점령한 포르투갈의 고위 상무관의 서신을 통해서 수차례 포르투갈 왕에게 전달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포르투갈은 티모르를 향한 새로운 뱃길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은 16세기 중엽까지 이미 동남아 여러 해안에 자리 잡은 군소 도서 왕국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확보하고 있었다.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영국과 네덜란드도 티모르의 백단향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지만, 포르투갈은 16세기 말 경 이미 인도네시아 군도 동남부 소순다열도의 동쪽 끝자락인 ‘플로레스(Flores)-쏠로르(Solor)-티모르(Timor)’ 섬을 잇는 백단향 주요 산지를 개척한 선두 주자로 자리 잡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향료군도에서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에 앞서서 전략적으로 영향권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백단향 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과 이슬람 상인들이 백단향 무역망을 파고들어 포르투갈의 독점 야욕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티모르 주민들도 유럽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모해 가는 상황에서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며 포르투갈에게 무역 독점권을 선뜻 넘겨주지 않았다. 이렇게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값 비싼 백단향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한 각지의 도벌꾼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단향을 베어냈기 때문에 금빛 찬란하던 백단향 무역은 점차 그 빛을 잃어가게 되었다. 

유럽대륙의 양대 강국인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지역에 위치한 네덜란드는 강인한 생존력과 뛰어난 상업적 수완으로 오늘날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어 유럽연합의 5대 강국으로 자리매김한 나라이다. 그러므로 이 나라가 유럽 열강들과 경쟁하며 식민지 경략시대를 어떻게 헤쳐 나갔을까하는 상상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천부적으로 뛰어난 상재(商才)를 지닌 네덜란드인들은 국왕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무장하고 인도네시아 군도로 뛰어 들었다. 이들은 곧 대범하고 저돌적이며 탐험심에 불타는 포르투갈인들과 맞붙게 되었다.

티모르를 사이에 두고 벌어졌던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각축전은 유럽 대륙을 포연(砲煙)으로 뒤덮었던 수많은 전쟁 중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포르투갈-네덜란드 양국의 전쟁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고 전혀 우열을 가늠할 수도 없었다. 지루하게 전개된 양측의 공방은 언제나 참담한 결과를 초래하고 끝났으며 예고도 없이 재개되었다. 유럽 대륙의 소국인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유럽을 벗어나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태평양 연안의 여러 지역을 침공하여 제국주의적 힘을 과시했는데, 양국의 티모르 쟁탈전은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이었다. 

티모르를 독점하기 위해서 두 나라가 벌인 힘 겨누기에서 참혹한 전쟁을 거쳐 타협점을 찾아가기까지의 전 과정은 티모르인들의 정체성 형성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필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유럽 열강들이 티모르 향료군도에서 얼마나 끈질기게 목적 달성을 위하여 전력투구했는지, 또 티모르인들은 그들에게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그들만의 생존방식을 터득했는가를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1641년 드디어 향료군도 말루꾸(Maluku)에서 포르투갈 군대를 몰아냄으로써 이 지역의 향료무역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포르투갈의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대(對) 포르투갈전 승세(勝勢)의 쐐기를 박았다. 당연하게 상당부분까지 백단향 무역도 네덜란드의 수중에 들어왔으나, 포르투갈이 말루꾸 군도에서 완전히 손을 씻고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이로 인해서 네덜란드는 군사적 충돌이 재연될 가능성에 대비하여 아직 몇 군데 남은 포르투갈의 영향권 지역에 대한 정보입수에 심혈을 기울였다. 

포르투갈이 선점(先占)했던 티모르의 중요성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백단향 때문이었다. 유럽에서 샌달우드(sandalwood)로 불린 백단향은 호사스러움과 부귀가 넘쳐흐르던 중세 유럽황실이 가장 선호하는 가구와 악기와 장식품을 만드는데 쓰였다. 특히 백단향의 뿌리 부분은 짙은 향기가 반영구적으로 지속되어 각종 조각과 세공품을 만드는데 쓰였다. 뿐만 아니라 백단향의 목질부(木質部)는 성질이 온(溫)하여 가슴앓이, 배앓이, 곽란(癨亂) 등을 다스리는 약재로써 특별한 효능이 있었다. 그러므로 동인도를 항해하는 유럽 무역선이 가장 오랫동안 선호했던 최고가의 교역품은 단연 백단향이었다. 

1818년 네덜란드 정예군은 오늘날 동티모르의 수도인 딜리(Dili)를 빼앗고자 인근 항구도시인 아따뿌뿌(Atapupu)에 기습적으로 상륙하였다. 철옹성이었던 아따뿌뿌의 포르투갈 요새는 힘없이 무너지고 포르투갈 깃발이 끌어내려 졌으며 대신 네덜란드 국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1641년 포르투갈과 전쟁을 끝내면서 맺은‘네덜란드-포르투갈평화협정’에도 불구하고 최상품 백단향의 집산지인 아따뿌뿌와 마우바라(Maubara) 같은 포르투갈 영지를 손에 넣기 위한 야욕을 이때까지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다. 

티모르의 중심도시 딜리에서 가까운 아따뿌뿌와 티모르 북부 해안의 양항(良港)이었던 마우바라에는 많은 무역선들이 드나들었다. 포르투갈 왕국으로서 아따뿌뿌는 관세를 비롯해서 수입품 소비세와 인두세를 거둬들이는 매우 중요한 세원(稅源)이었다. 포르투갈 정부는 네덜란드 식민군대의 아따뿌뿌 기습점령을 항의하고 네덜란드 정부에 협상을 요구했다. 네덜란드의 대응이 여의치 않을 경우, 전쟁 재개를 불사할 것임을 명백하게 전하면서 동시에 아따뿌뿌 항구 불법점령으로 인한 포르투갈의 재정손실을 배상하라는 항의서한을 함께 보냈다. 당시 네덜란드는 티모르 지역에서 중국 무역상들과 백단향 교역을 위한 탄탄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었으나, 지역 내 기반은 포르투갈이 네덜란드의 우위에 있었다. 

네덜란드-포르투갈 간의 끊임없는 분쟁을 종식시키고자 1850년 네덜란드의 외무장관이 포르투갈로 서신을 보냈다. 이듬해 양측의 동의안 작성을 위해서 양국의 사절단이 오가게 되었다. 지루한 공방과 결렬과 속개가 반복된 양측의 회합은 10년이나 지속되었다. 결국 1861년 양국은 동의안에 서명하게 되었고, 새로운 협정이 공식적으로 발효되면서 티모르와 티모르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동서로 나뉘게 되었다. 이로서 동(東)티모르는 오늘날 독립을 이룬 동티모르(Timor Leste)가 되었고, 서(西)티모르는 네덜란드 통치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네시아가 독립하면서 인도네시아령으로 귀속되었다. 

티모르를 동서로 가른 후에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양국은 상대국에 대한 견제와 티모르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경쟁과 견제를 계속하였다. 이들 양국이 티모르에서 벌인 정치적, 행정적, 문화적으로 행한 영토와 영향력 확대를 위한 접전은 20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두 식민정부는 결국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들 양국은 영토분쟁과 영향력 확대에만 전력투구를 한 나머지 티모르 영내에서 벌어진 노예무역, 살인, 인신 매매, 종족 간의 내전 등 끊임없는 사건과 혼란을 막을 힘도 의지도 재원도 모두 소진(燒盡)하고 말았다. 

양국의 지칠 줄 모르는 쟁탈전은 티모르인들의 투지를 더욱 뜨겁게 불태우는 데 한 몫을 하였다. 그들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라는 두 외세가 가한 고통과 핍박으로 더욱 단련된 머리와 눈과 가슴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티모르인들은 두 식민 열강 사이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독립을 향하여 쉼 없는 반보(半步) 행진을 계속하였다. 언제까지나 흔들림 없이 건재할 것으로 굳게 믿었던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군사력도 그들에 항거했던 지역의 작은 실력자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유럽의 식민통치자들의 선두에 섰던 나라는 분명 포르투갈이었다. 또한 동티모르가 포르투갈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식민통치 영역의 외곽에 있으므로, 네덜란드 시대를 끝내고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이후에도 국제정치무대에 동참하지 못하였다. 티모르에 관한 서구 열강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시기는 17세기 중반뿐이었으며, 포르투갈령으로 남겨진 동티모르와 유럽의 빈국(貧國) 포르투갈과의 관계는 미미한 정치적 연대가 전부였다. 더구나 티모르 섬이 인도네시아 동부 군도인 소순다열도의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동티모르를 오래도록 외부세계와 단절시켰다. 

티모르에는 수 세기 전부터 악성 전염병인 천연두와 문둥병 같은 괴질이 자주 돌아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다가 1898년과 1899년 사이에 백신(vaccine) 의술이 전해지면서 희생자 수가 다소 감소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질병 이외에도 19세기 말까지 티모르 주민들이 많이 줄어든 원인은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 많은 티모르인들은 노예가 되어, 인도네시아의 여러 지역을 거쳐 유럽시장으로 팔려 나갔다. 티모르의 노예무역은 네덜란드동인도회사에게 백단향과 함께 많은 이익을 남겨 주었다. 그러다가 네덜란드 정부는 1860년 이래로 노예무역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노예의 불법거래는 계속되었는데, 이때부터는 중국 무역상들이 주도하였다. 티모르에는 잦은 가뭄과 홍수, 그리고 갖가지 풍토병이 반복해서 찾아 왔다. 티모르는 그만큼 비극적인 땅이었다. 

포르투갈령으로 있었던 약 4세기 동안 동티모르는 국가 형태도 갖추지 못하였고, 통일된 언어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여러 종족들이 합심하여 포르투갈의 그늘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 적도 없었다. 프랑스의 경우,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점령하고 있던 시기에 이들의 국가 정체성 강화를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포르투갈은 이 점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티모르인들은 제대로 된 언어교육도 받지 못하고 포르투갈어의 고어(古語)인 테툼(Tetum)어를 공용어로 사용해 왔다. 이처럼 참담한 포르투갈령 동티모르의 상황은 1860년대 현지 총독으로 재임했던 아퐁소 카스트로(Affonso de Castro)에 의해서 비로소 외부 세계로 알려지게 되었다.

백단향으로 시작된 티모르의 비극적인 역사는 백단향 소출이 거의 끊긴 19세기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팜오일과 대단치 않은 채광권(採鑛權) 같은 부스러기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열강들의 경쟁과 종족 간의 이해 다툼이 자주 일어났다. 이런 상황 하에서도 식민정부는 각종 조세제도의 멍에를 헐벗고 굶주린 자들에게 씌웠으므로 동티모르 주민과 식민정부 간의 원만한 관계란 있을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네덜란드령 서(西)티모르가 인도네시아령으로 귀속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받아온 동(東)티모르는 계속해서 국제질서 변동의 외곽에 방치되어 있었다. 동티모르를 점령했던 일본군으로부터 통치권을 회복한 이후에도 포르투갈은 이곳을 독립시키기 위한 어떠한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지난 1960년대 이래 가톨릭계의 선교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엘리트층이 1974년 포르투갈에 민주정부가 들어선 뒤로 민족주의적 정치세력으로 등장해서 독립주체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 <동티모르와 브루나이>(한국외대 출판부, 2012)에서 옮겨서 재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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