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양승윤] 사라와크: 코뿔새 끄냘랑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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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윤] 사라와크: 코뿔새 끄냘랑의 땅

기사입력 2015.11.02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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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양승윤 한국외대 명예교수(동남아학)

  사라와크(Sarawak)는 보르네오 섬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126,500㎢의 면적에 242만 명(2010년)의 주민이 살고 있다. 한국(남한)의 국토 면적(99,720㎢)과 인구 5,000만 명(2014년)에 비교하면, 양 지역의 인구 조밀도가 확연하게 구별된다. 동서로 750㎞나 길게 펼쳐져 있는 사라와크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큰 주로 전체 국토 면적의 37.5%를 차지하며, 인구 면에서도 말레이 반도의 슬랑오(Selangor)주, 죠호(Johor)주, 그리고 인접한 사바(Sabah)주 다음으로 주민들이 많은 주이다. 사바와 함께 1963년 말레이시아연방에 가입하였다. 말레이 반도의 9개 주와 달리 세습 술탄이 없고, 이민법 관련 약간의 자치권을 가지고 있고, 중국계 주민이 많은 점도 사바와 비슷하다. 

▲ 코뿔새 끄냘량. (사진=위키피디어 제공)

  사라와크는 ‘코뿔새 끄냘랑(kenyalang)의 땅’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이 새는 사라와크 정글에서 발견되는 희귀종의 하나로 국제적인 보호 조류에 속한다. 노랗거나 분홍색의 부리 위에 같은 색깔 같은 크기의 뿔이 부리 방향으로 나 있다. 부리 끝에서 꼬리 깃털까지의 길이가 1미터 내지 1.3미터이며, 체중이 3-4킬로나 되고, 35년 내지 50년까지 장수한다. 밀림의 전사(戰士) 다약족들이 ‘전쟁의 신’으로 받든다. 끄냘랑의 머리 부분과 깃털은 예로부터 전사들의 장식품이었으며, 오늘날 사라와크 주정부가 군인들에게 수여하는 훈장 명칭도 끄냘랑이다. 코뿔새의 코에 글자를 새겨 중국에 보내는 조공품으로 쓰였다는 기록도 있다. 

  사라와크는 브루나이 이슬람 술탄왕국의 영역이었다. 브루나이 술탄 뜽아(Sultan Tengah) 치세기인 15세기에 크게 번성하던 사라와크는 북부 일부 해안을 드나드는 포르투갈 상인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역이 브루나이 왕국의 영향 하에 있었다. 16세기로 들어서면서 포르투갈 사람들도 이곳 출입이 뜸해졌는데, 포르투갈이 점령한 말라카 왕국과 말라카 해협의 중요도가 이전에 비해서 크게 떨어진 까닭이었다.

  19세기 초까지 느슨하나마 브루나이 영역이었던 사라와크는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2세(Omar Ali Saifuddin II: 재임 1827-1852) 때 혼란 시대가 도래하였다. 사라와크의 토호들이 술탄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술탄은 1839년 하쉼(Pangeran Muda Hashim) 왕자를 보내서 평정을 명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았다. 이 때 제임스 브룩크(James Brooke)가 전함을 타고 이곳에 등장하였다. 처음(1839년)에는 하쉼의 도움 요청을 거절했으나, 1841년 사라와크로 다시 돌아와서는 조건부로 이를 수락하고 토호들의 반란을 수습하였다. 그 해 9월 하쉼과 브룩크 간에 협정이 맺어지고, 브룩크에게는 사라와크의 영주(governor)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1846년 하쉼이 죽자 브룩크는 스스로 사라와크의 왕이 되어 백인왕조(White Rajah Dynasty of Sarawak) 시대를 열었다. 사라와크에 영국인 백인왕조 성립이 가능했던 배경은 1824년의 영화조약(Anglo-Dutch Treaty)이었다. 영국은 이 때 말라카 해협과 향료군도에 대한 네덜란드와의 분쟁을 끝내고 말레이반도와 사바-사라와크로 이어지는 장대한 경계로 통행권을 확보하였는데, 중국과의 교역로 선점 확보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제임스 브룩크는 1803년 영령인도(British India)의 바라나시(Varanasi)주에서 출생하였다. 영국동인도회사 소속 벵갈(Bengal)군 초급장교로 복무 중 제1차 영국-버마전쟁(1824-25)에서 부상하여 영국으로 귀환하였다. 무인(武人) 가문의 일원이었던 그는 1833년 3만 파운드의 부친의 유산으로 퇴역 전함(Royalist호)을 불하받아 탐험여행에 나섰다. 1838년 제임스 브룩크가 사라와크에 도착했을 때, 해안의 요지 마다 토호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필리핀 모로(Moro)족 해적들이 준동하고 있었다. 제임스 브룩크는 1841년 하쉼의 요청을 받아들여 지역 수준의 반란을 진압한 후, 사라와크 북부 해안 전역을 장악하였다. 그는 나아가서 노예사냥을 금지하고, 토지를 개발하여 식량을 증산하여 내정을 확고하게 관장하는 한편 대외무역에도 나서 왕국의 재정을 굳건히 하였다. 

  1868년 제임스 브룩크가 죽자 챨스 브룩크(Charles Anthony Brooke)로 개명한 여동생의 아들이 뒤를 이었다. 해군에 복무했던 그는 1852년부터 사라와크 왕국에서 제임스 브룩크를 도왔다. 재임 기간(1868-1917) 중 전임자의 업적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이반족들의 전통적인 악습이었던 헤드커팅(headcutting)을 금지하고, 박물관과 학교를 세우는 등 말레이 계 등 현지 주민들을 위한 복지정책도 개발하였다. 영국 본국 정부는 챨스 브룩크 재임 중 사라와크를 보호령으로 선포하였다. 챨스 브룩크의 6남매 중 넷째였던 동명의 아들(Charles Vyner Brooke)이 백인 왕조의 3대 군주(재임: 1917-1946)가 되었다. 1941년 일본이 침공하자 호주로 피신하였다가 귀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1946년 7월 본국 정부에 통치권을 양도하여 3대 105년(1841-1946)에 걸친 사라와크의 백인왕조 시대가 막을 내렸다. 

  총 연장 900㎞에 달하는 해안선을 가진 사라와크는 사라와크 강, 루파(Lupar)강, 사리바스(Saribas)강, 라쟝(Rajang)강 등이 너른 해안 습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 중 라쟝 강이 563㎞로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긴 강이다. 주도(州都) 꾸칭은 사라와크 강에 연결되어 있다. 동서로 완전히 분리된 브루나이의 두 지역 사이를 흐르는 림방(Limbang)강도 주요 하천의 하나이다. 림방 강 인근의 중심 도시 림방(Limbang)은 예로부터 쌀 생산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1888년 이래 사라와크 백인 왕조의 2대 챨스 브룩크 왕은 림방 직접 통치를 고집하여 끝내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다. 브루나이 만(灣)으로 빠지는 림방 강이 오늘날 브루나이 영토를 동서로 분리하면서 그 사이의 림방이 말레이시아령 사라와크로 남게 된 역사적 배경이다. 브루나이의 림방 회복 노력은 독립 이전부터 꾸준하게 전개되었으나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브루나이는 결국 동쪽 영토인 뜸브랑(Temberang)과 서쪽 영토인 무아라(Muara)를 연결하는 왕복 4차선에 전장 22㎞의 초대형 해상교량건설 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인천대교의 해상교량은 12㎞이다.) 꾸칭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도시는 해안 습지에서 조금 떨어진 고지대에 형성되어 있지만, 제2의 도시인 미리(Miri)처럼 습지 가까이에 위치한 도시도 있다. 사라와크와 인도네시아령 칼리만딴(Kalimantan)의 경계에는 꽤 높은 산악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사라와크에는 자신들의 언어와 고유한 문화와 생활습속을 가진 40여 종족이 있다. 도시를 중심으로는 말레이족과 중국계 인도계가 많이 거주한다. 이들 이외에 소수의 이반(Iban) 족과 멜라나우(Melanau) 족이 도시에 섞여 산다. 이반 족은 주로 내륙 산악종족이며, 멜라나우 족은 사라와크에만 있는 종족으로 해안 지역이나 해안 인근의 섬에 모여 사는데, 이들 두 종족은 모두 다약(Dayak) 계통의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다약 족은 보르네오(칼리만딴, 사바, 사라왁크)에 넓게 분포되어 강인한 종족성을 유지하며 군거지에 따라 다양한 갈래(하위 종족)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국경에 관계없이 협동하고 상호존중을 목표로 하는 ‘다약족 규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체 인구 측면에서 볼 때, 사라와크의 주민은 2011년 통계로 이반 족 29%, 중국계 24%, 말레이족 23%로 상위 그룹을 형성하고, 이반 족 하위 갈래인 비다유(Bidayuh) 족 8%, 멜라나우 족 6%, 울루(Ulu)족 5% 등으로 하위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종교분포도 매우 흥미롭다. 2010년의 센서스에 의하면, 사라와크 주민의 44%가 기독교를 신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슬람이 30%로 뒤를 잇고 있고, 불교도도 13.5%나 된다. 유교와 도교 등 다양한 중국계 종족의 종교를 내세운 사람도 6%에 달한다. 일반적으로 이반 족의 기독교, 말레이족의 이슬람, 중국계의 불교를 사라와크의 3대 종교로 보면 무난하다.

  석유 왕국 브루나이 이웃에 위치한 사라와크에서도 원유와 천연가스가 많이 생산된다. 콸라룸푸르(Kuala Lumpur) 연방정부의 재정 수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원유와 가스 생산인데, 사라와크는 연방정부로부터 총 생산의 5퍼센트를 로열티 명목으로 추가 예산을 배당받는다. 사라와크는 연방직할 콸라룸푸르와 국제금융 특구 라부안(Labuan)에 이어 세 번째로 소득 수준이 높은 주이다. 이곳의 남양재(南洋材) 생산과 가공수출이 사라와크 재정 수입에 큰 몫을 하고 있다. 전통적인 수출품목 중 사라와크 산 남양재가 단연 으뜸이기 때문이다. 1996년부터 2000년 사이에 말레이시아가 수출한 제재목은 1400만 입방 미터로 세계 1위라는 유엔 통계도 있다. 지난 1970년대 한국의 수요 수출품이었던 합판도 오늘날에는 인도네시아와 태국과 함께 말레이시아가 주도하고 있는데, 주요 생산지가 사라와크에 있다. 이밖에도 말레이시아의 주석(朱錫), 천연고무, 후추와 팜 오일 등 네 가지가 국제무역시장에서 꾸준하게 잘 팔리고 있다. 이 중에서 후추는 사라와크 산이 가장 좋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사라와크의 주도는 인구 35만 명(2013년)의 꾸칭(Kuching)이다. 이 도시가 브루나이 왕국의 고도에서 현대적 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은 사라와크 제2대 왕 챨스 브룩크 재임 기간이었다. 그는 재임 중 공중보건 위생시설 건설에 공을 들였으며, 병원을 짓고, 교도소를 세우고, 요새를 쌓고, 상설 시장을 열었다. 챨스 브룩크는 1872년에 이르러 도시명 꾸칭을 왕도(王都)로 공식화 하였다. 그러나 도시명 꾸칭은 이 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제임스 브룩크가 1839년 사라와크에 내도하여 전함을 타고 사라와크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 그의 통역을 맡았던 원주민이 지역 명칭을 묻는 제임스 브룩크가 가리키는 방향에 있던 짐승(고양이)을 보고 꾸칭이라고 답하여 꾸칭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밖에도 사라와크에서 많이 발견되는 나무 열매 ‘마따 꾸칭’(mata kuching: 고양이 눈)에서 따 왔다는 설과, 1888년 사라와크에 콜레라가 크게 창궐하여 식수(食水) 공급에 어려움을 겪을 때 중국인들의 집단 거주지에서 수량이 풍부하고 깨끗한 ‘오래된 우물’이 발견되어 수많은 사라와크 주민을 구했는데, 중국인들이 이 우물을 꾸(古)칭(井)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사라와크 원주민의 가장 큰 집단은 이반(Iban)족이다. 밀림 속의 이반족들은 루마 빤쟝(rumah panjang)이라고 칭하는 장가옥(長家屋)에 집단으로 거주한다. 장가옥은 대개 야산을 등지고 전면이 멀리 내다보이며 하천이 가까운 곳에 세운다. 3-4미터 높이로 야자나무 기둥을 여러 개 세운 뒤 기둥 위로 넓은 마루를 깔고, 그 위에 주거 공간을 만든다. 주거 공간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산 쪽 방향으로 여러 가구가 가족 단위로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독립된 출입구가 있고, 내부는 침실과 부엌으로 나뉘며, 아주 작은 부엌 뒷문을 열면 야산으로 연결되는데, 이곳에는 빠짐없이 작은 텃밭이 있어서 각종 야채를 가꾼다. 가장 큰 부분은 대형 강의실을 가로로 서너 개 또는 그 이상으로 연결해 놓은 것 같은 넓이의 공동생활 공간이다. 구석으로 아이들의 놀이기구와 축제 등 각종 행사에 쓰이는 소도구가 놓여 있다. 마지막 부분은 공동생활 공간 밖에 있다. 이곳에는 지붕이 없다. 주로 빨래와 곡식을 널어 말리는 마당 같은 역할을 한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창고와 화장실이 이곳에 있는데, 화장실 아래쪽 지상에는 돼지우리가 있다. 주거 공간으로 오르내릴 때는 사다리를 이용한다. 발 디딜 틈새를 파 놓은 야자나무가 사다리 구실을 한다. 사다리는 고정되어 있지만, 타 종족(주로 마두라 족 등 쟈바 이주민)과 거친 몸싸움을 할 때, 야간에는 사다리를 위로 들어 올린다. 대문을 걸어 잠그는 셈이다. 

  작은 장가옥에는 대개 열 가족 40-50명 정도가 함께 산다. 그러나 대규모 장가옥에는 200명 이상이 거주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숙식은 가족 단위로 한다.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할 때는 공동으로 나선다. 오늘날까지도 숨삐딴(sumpitan)이라 하여 긴 대롱을 이용하여 독침을 날려 나무 위에 있는 식용이 가능한 조류나 작은 짐승을 잡는다. 멧돼지 같은 큰 짐승 사냥에는 활과 죽창을 사용한다. 이들이 경제활동을 통해서 수집한 짐승가죽, 관상용 새, 야생 커피와 후추의 생두, 고구마 같은 것을 시장에 내다 팔고, 생필품을 사온다. 

  사라와크의 밀림 속에는 수량이 풍부하고 유속이 빠른 하천이 많다. 교통편으로 강력한 엔진(주로 일제)을 장착한 몸체가 좁고 긴 제트 보트가 하천을 오르내린다. 여러 지류가 합쳐지는 지점에는 대개 초등학교와 생필품 가게가 있다. 밀림 속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이반 족이 대부분임)이 자녀들을 이곳에 보내서 공부시킨다. 콸라룸푸르 연방정부가 오래 전부터 원주민 2세 교육에 공을 들여왔다. 학교시설이 깨끗하고 기숙사 시설이 완비되어 있다. 작은 교정에는 말레이시아 국기와 사라와크 주기가 나란히 게양되어 있다. 부모들은 수업 요일에 아이들을 학교에 맡겼다가 주말에 데리러 온다. 군소 종족들의 종족성(種族性) 유지 보다 정부 주도의 국민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원주민들은 대개 자녀들의 교육기회에 만족해하는 것 같다. 

  이곳에 있는 쇼 윈도우도 없는 허름한 가게에는 원주민들의 생활필수품이 준비되어 있다. 쌀, 석유, 성냥, 식용유, 소금, 설탕, 라면 같은 것이다. 원주민들의 생활수단이 이곳을 경유한다. 물물교환도 이루어진다. 가게는 거의 모두 나이 많은 중국인들이 지키는데, 가게의 실질적인 주인은 꾸칭이나 미리 같은 도시에 산다. 

  지난 90년대 초부터 사라와크 밀림 속의 이반족과 그들의 생활터전이 관광 상품으로 등장하여 꾸준하게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해안 도시에서 관광선을 타고 가다가 제트 보트로 옮겨 타고 다시 서너 시간을 긴장 속에 상류로 달린다. 관광객들은 장가옥의 공동생활 공간에서 여장을 푼다. 귀빈을 대접하는 최고의 요리로 살코기보다 비개가 훨씬 많은 통돼지 바비큐가 준비된다. 식사 후 이반족 전사들의 전통적인 전투 무용이 공연된다. 몸놀림과 칼 다루는 솜씨가 일품이다. 퐁피두(Pompidou)센터의 초청도 받아 프랑스 공연도 여러 차례 했다고 자랑한다. 

  잠자리에 들어 천정을 바라보는 순간 대들보 윗자락에 나란히 늘어놓은 수십 개의 해골 때문에 순식간에 잠이 달아난다. 억지로 잠을 청하면서도 목둘레가 자꾸 만져진다. 오래지 않아 온갖 새 소리와 창문 두드리는 원숭이들 뛰는 소리에 잠이 깬다. 칙칙한 밀림 속으로 아름다운 새 아침이 찾아온 것이다. 

양승윤(syyang@hufs.ac.kr) 2015. 10. 27(죡쟈카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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