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양승윤] 이슬람국가 인도네시아의 불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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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윤] 이슬람국가 인도네시아의 불교문화

기사입력 2015.10.27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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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의 승방(僧房) 보로부두르
  
   보로부두르(Borobudur) 대탑사원은 인도네시아 중부 쟈바 마글랑(Magelang) 남서쪽에 위치하는데, 인도네시아의 역사문화 중심도시인 죡쟈카르타(Yogyakarta)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보로부두르는 바라(bara)와 부두르(budur) 등 두 단어로의 합성어로 이루어졌다. 바라는 산스크리트어의 비하라(vihara)에서 차용하였는데, 오늘날 인도네시아에서 ‘힌두교나 불교 사원이 있는 공간’을 뜻하는 비하라(bihara)로 쓰이고 있다. 부두르는 비하라의 어원과 달리 발리(Bali)어의 브두후르(beduhur)에서 차용하여 부두르로 변형되었으며, ‘위 쪽’이라는 뜻이다. 인도네시아 불교문화에 정통한 수타르노(Soetarno R.) 교수가 1986년에 출간한 “인도네시아의 다양한 고찰(古刹)(Aneka Candi Kuno di Indonesia)”에 나오는 매우 세밀한 각주가 붙은 상세한 설명의 일부(79쪽)다. 보로부두르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위쪽의 절’ 또는 ‘윗동네의 절’이 된다. 


▲ 보로부두르 사원 상단에 있는 스투파 내 불상. 2013년 1월 머라삐 화산 분출로 대기에 화산재가 퍼져 뿌옇고, 사진 오른편 스투파는 화산재로 인한 부식을 막기 위해 천막을 씌웠다. (사진=데일리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는 캄보디아 시엠립(Siem Reap)의 앙코르(Angkor)사원과 인도 마드야 프라데쉬(Madhya Pradesh)에 위치한 산치(Sanchi) 사원과 더불어 세계 3대 불탑(佛塔)으로 알려졌는데, 기네스북은 2012년 오랜 논란 끝에 이들 세 사원 중에서 보로부두르를 세계에게 가장 큰 불교사원으로 등재하였다. 위쪽의 절이나 윗동네의 절로는 거리가 느껴지는 이유다. ‘큰 재 너머 대승원(大僧園)’으로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봐도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 인도네시아에 있는 세계 최대의 불교사원의 이름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이 세상의 많고 많은 큰 불교 사원과 차별성을 가지기 위한 역발상(逆發想)에서 누군가가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을 ‘언덕 위의 승방(僧房)’으로 작명해 놓았다. 이 또한 불교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필자도 이에 따르기 로 하였다.

   인도네시아의 불교는 다양한 불교문화가 혼재되어 발전하였다. 그 갈래를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쉽지 않지만, 전체적으로는 고대 인도의 원시 불교인 마하야나(Mahayana)불교, 태국 불교,  일본의 선(禪)불교, 뜨리다르마(Tridharma)라 칭하는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道敎)가 합치된 유불선(儒佛仙)교,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을 건축했던 사일렌드라(Sailendra)왕조를 거쳐 마쟈빠힛(Majapahit)왕조에서 번성했던 밀교(密敎) 형태의 탄뜨라야나(Tantrayana)불교 등이다. 이 나라 수도 쟈카르타의 차이나타운인 글로독(Glodok)에 금덕원(金德院)이라는 큰 절이 있다. 인도네시아어로 다르마 박티 사원(Wihara Dharma Bhakti)이라고 하는데, 석가모니와 공자를 같이 모신 서원(書院) 같은 사원(寺院)이다. 금덕원이 상징하는 불교적 요소에서 알 수 있듯이 인도네시아의 불교도는 거의 모두가 중국계 후예들이며, 종교(불교) 자체에도 중국문화적인 요소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 수카르노(Sukarno) 시대의 인도네시아는 베이징(北京) 정권과 가까웠고, 많은 중국인들이 드나들면서 전통 왕조시대부터 뿌리 내린 중국문화가 이 때 꽃을 피웠다. 군부 실력자로 집권한 수하르토(Suharto)는 반공(反共)과 반중(反中) 정책으로 군사정부의 정당성을 찾고자 했다. 그래서 수하르토 통치기에 중국계와 중국문화는 철저하게 수난을 당하였다. 대통령령으로 유교, 중국어(한자), 중국문화(특히 유교적 요소)는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중국적 요소라 하여 불교 사원에서 촛불도 켜지 못하게 하였다. 와히드(A. Wahid)대통령이 등장하면서 수하르토의 반중 대통령령이 철폐되고, 34년 만에 중국계와 중국문화에 대한 모든 규제가 폐지되었다. 메가와티(Megawati S.)는 대 중국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2002년 중국인들의 명절인 구정(舊正)을 국가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유도요노(SBY) 대통령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2006년 2월 중국계 국민들에 대한 모든 차별정책 철폐를 공식 선언하고, 같은 해 12월에는 신국적법에 따라 일반 인도네시아 국민들과 똑 같은 시민권을 향유하도록 제도화하였다. 이에 따라 자신이 중국계 인도네시안 임을 나타낸 사람들이 4퍼센트에 이른다. 인도네시아 2억 5천만 인구 중 1천만 명의 중국계들이 이제까지 주저했던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대 인도네시아 적극적인 유화정책을 통해서 동남아의 대국 인도네시아에서 중국문화의 부활, 중국계 국민들의 완전한 복권, 중국의 국격(國格) 제고에 정성을 쏟았다. 유도요노 대통령에게 국가 차원의 중국문화원 건립을 제안하였고, 유도요노는 죡쟈카르타 주지사 술탄 하멩꾸부워노(Hamengkubuwono X)를 상하이에 보내서 정부급에 준하는 초대형 문화원을 죡쟈카르타에 세우기로 하였다. 유도요노는 퇴임 직전인 2014년 10월 이제까지 중국과 중국인을 비하하는 의미가 포함된 단어인 ‘찌나(Cina)’ 사용을 지양하고, 중국인(中國人)은 오랑 띠옹꼭(orang Tiongkok)으로, 중화(中華)문화는 부다야 띠옹호아(budaya Tionghoa)로 칭할 것을 촉구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하였다. 전체 인구의 87퍼센트가 무슬림(이슬람교도)인 인도네시아의 불교도는 중앙통계청(Biro Pusat Statistik Indonesia)의 2014년 공식통계로 전체 인구대비 0.72퍼센트인 180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처럼 복잡한 정치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이 수치는 곧 배가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인도네시아 불교도의 최대 축일은 와이삭(Hari Raya Waisak)이라고 한다. 와이삭은 태음력과 태양력을 둘 다 기초한 인도 달력 2월인 비사카(Visakha)월의 보름날이다. 북방불교에서는 석탄일을 음력 4월 초8일(2015년은 5월 25일)로 정하고 있지만, 남방불교에서는 비사카 월의 보름날을 축일로 삼고 있어서 2015년의 경우 6월 2일이다. 이 날을 베삭(Vesak)이라 하는데,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어 발음의 편의에 따라 와이삭(Waisak)으로 불리고 있다. 북방불교의 석탄일과는 달리 남방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탄생과 성불(成佛)과 열반(涅槃)이 모두 이 날 하루에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와이삭을 공식적인 국가종교 휴일로 채택하고 있다.

   와이삭 축제는 매 년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에서 행하여진다. 불자들은 보로부두르 축제에 앞 서 보로부두르에서 약 7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문띨란(Muntilan)마을의 먼둣(Mendut)사원에 모여 봉축 불공을 드리고, 보로부두르까지 불경을 봉독하며 도보행진을 한다. 도보 행진 중간에 잠시 빠원(Pawon)사원에 머무는데, 먼둣과 빠원 사원을 거쳐 보로부두르 대탑 사원에 이르는 길은 일직선상에 있고, 옛날에는 벽돌을 깐 도보 순례 길이 이들 세 사원을 연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도보 행진의 전통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로부두르에서 와이삭 축제가 벌어지면, 인근 동네 주민들과 많은 관광객들이 운집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인도네시아 불교도들은 자신들의 종교 행사가 행사 주최 측에 의하여 비종교적 요소가 가미되어 관광 상품화되고 있다고 크게 비판하고 있어서 금년도 봉축 행사가 어떻게 진행될 지 궁금하다.

   인도네시아 불교문화는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을 빼고는 설명이 어렵다. 그만큼 보로부두르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인도네시아의 불교왕국 시대는 7세기 말부터 약 600여 년 동안 말라카(Malacca) 해협을 중심으로 전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서부 쟈바와 서부 칼리만딴에 걸쳐 크게 발흥했던 스리위쟈야(Sriwijaya)왕국이 열었다. 이 거대한 왕국은 해상무역왕국이었다. 말라카 해협과 순다(Sunda) 해협 등 동남아의 주요 해로를 장악했으나, 내륙의 농업 지대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이웃 쟈바로부터 식량 일체를 공급 받아야 했다. 8세기 초 중부 쟈바에는 산쟈야(Sanjaya) 힌두왕국이 있었고, 스리위쟈야에 식량을 공급했으나, 왕국의 세력이 커지면서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관계에 돌입하였다. 두 왕국의 대립으로 중부 쟈바가 긴장 상태에 있는 사이에 쟈바 동북부에서 발흥한 사일렌드라(Sailendra) 불교왕국이 중부와 동부 쟈바를 지배하에 두고 같은 불교 왕국인 스리위쟈야와 긴밀한 교역관계를 유지하였다. 자연스럽게 불교문화가 만개하는 시대가 내도하였는데, 보로부두르 대탑사원도 이 때 축조되었다. 힌두 산쟈야 왕국의 후손들도 계속해서 사일렌드라 왕국의 외곽에서 세력을 키웠다. 9세기 중엽 산쟈야의 군주가 사일렌드라의 공주와 혼인하여 양국 간에 결혼동맹이 맺어지고, 중부 쟈바의 통제권이 다시 산쟈야 왕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산쟈야의 군주는 이를 기리기 위해서 보로부두르에서 멀지 않은 곳에 미려한 쁘람바난(Prambanan) 힌두사원을 세웠다. 사일렌드라나 산쟈야는 모두 산스크리트어에서 차용하였는데, 각각 ‘산을 다스리는 군주’와 ‘승리’라는 뜻이다.  

   사일렌드라 왕조는 마하야나(Mahayana) 불교를 바탕으로 약 70년에 걸쳐서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을 완공하였다. 결혼동맹으로 산쟈야 힌두왕국으로 주도권이 넘어 가면서 보로부두르는 점차 사일렌드라 불교 왕국과 불교도들의 관심에서 조금씩 이반(離叛)하였다.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는 1006년에 일어났다. 인근 머라삐(Merapi) 화산의 대폭발로 두 왕국의 터전이 사라지면서 보로부두르도 화산재에 묻히게 되었다는 것이 정설에 가깝다. 그러나 설득력을 지닌 반론도 있다. 사원 축조의 완성과 동시에 불교의 깊고 오묘한 뜻에 따라 인위적으로 덮었을 것이라는 설이다. 사원 기초를 닦은 흙과 사원을 덮고 있는 흙이 화산재 말고도 사원 바닥과 같은 성분의 흙이라는 것이다. 마하야나 불교는 힌두교리와 공통점이 많은 원시불교다. 고대 힌두왕국의 군주가 죽으면, 왕비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의 통치기에 만든 모든 제도가 담긴 법전도 모두 태워버린다. 후계자로 하여금, 더 나은 새로운 것과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라는 뜻이다. 보로부두르 대탑사원도 그랬던 것은 아닐까?  
   800년 넘게 흙더미에 묻혀 있던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이 적도의 뜨거운 태양 아래 재등장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영국사람 토마스 스탐포드 래플즈(Sir Thomas Stamford Raffles)(1781-1826)의 덕분이었다.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를 받던 인도네시아가 유럽 정세의 변화로 잠시 영국의 통치(1811-1816)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 때 영국 총독으로 바타비아(쟈카르타)에 등장한 인물이 싱가포르의 설계자인 래플즈경이었다. 말레이어에 통달하고 말레이 문화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던 그는 쟈바의 각종 고문서와 자료를 통해서 보로부두르의 존재를 확신하고, 1814년 탐사에 착수하여 수개월 만에 인류문화재를 발굴해 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태양 아래 드러낸 보로부두르는 다시 네덜란드의 수중에 놓이면서 고초와 쇄락을 거듭하였다. 여러 차례 대륙부 동남아로 진출을 시도했던 네덜란드는 다수의 보로부두르 불상의 머리 부분을 절취하여 불교왕국 태국 왕에게 진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총 504기의 부처님이 모셔진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의 불상(佛像) 중 약 35퍼센트는 두상 부분이 없다.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적으로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1973년부터 만 10년 동안 막대한 예산을 지원하여 세계 7대 불가사의 하나로 세계인들의 앞에 당당히 서게 되었다. 오늘날 연간 200만 명이 방문하는 보로부두르는 1991년 아시아 대륙에서 최초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세계 최대의 불교 사원인 보로부두르는 웅장하기가 실로 경이적이다. 폭 124미터의 정방형 위에 9층 건물 높이로 세워졌다. 원래는 42미터 높이였으나 현재는 35.3미터로 침하되어 있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50센티미터 높이가 30센티미터 크기의 안산암(安山巖)과 화산암(火山巖) 벽돌을 사용하였는데, 내부의 공간 없이 접착제나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보로부두르를 불가사의로 칭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는 사원을 중심으로 반경 30킬로미터 이내에는 보로부두르를 축조한 돌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14,165 평방미터에 달하는 면적 위에 100만 개가 넘는 돌벽돌 350만 톤을 완벽한 배수시설 위에 차곡차곡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쌓아 올린 것이다. 
▲ 보로부두르 사원 상단 스투파. 종모양의 스투파마다 안에 불상이 있다. 2013년 1월 머라삐 화산에서 분출된 화산재로 인해 대기가 뿌옇다. [사진: 데일리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에는 총 73기의 종탑 모형의 스투파(stupa)와 504기의 부처님이 있다. 필자가 보로부두르 사원을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으로 칭하는 연유이다. 이곳에는 4개 층에 거쳐서 5킬로미터에 달하는 회랑이 있고, 회랑 좌우면에는 총 2,500면의 부조(浮彫)가 있다. 이 부조에 등장하는 인물은 1만 명이 넘는다. 거대한 조각 작품의 숲인 셈이다. 이 조각 중에는 항해 중인 대형 선박들이 많이 나온다. 사일렌드라 왕조시대에 이미 인도네시아 군도는 해상 실크로드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이 회랑을 따라 돌면서 마지막 계단에 오르면 종탑 모형의 스투파가 있고, 스투파 안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이곳의 불자들은 부처님의 몸에 손을 대고 소원을 말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은 이른 아침에 아직 안개가 걷히기 전에 보아야 한다. 아직 안개 속에 있는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면, 누구나 속세의 모든 허물이 정화되어 극락의 문 안으로 들어서는 느낌을 가진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하나 둘씩 조명이 켜지는 늦은 시간에 좀 멀리 떨어져서 보는 보로부두르도 장관이다. 한 낮에는 이글거리는 적도의 태양이 쏟아내는 열기로 화산암이 달궈지면, 아무리 정신을 차려도 보로부두르의 진수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세와 인연을 믿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한 번 가 볼만한 곳이 아니가 한다. 

   양승윤(syyang@hufs.ac.kr)
   2015년 3월 5일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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