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문환 / 칼럼니스트
수하르또 정권이 장기집권의 정점으로 치닫고 있던 1990년 12월 7일, 하비비 과학기술부장관은 NU, 무하마디아 등 주요 종교단체의 지도자 49명을 규합하여 ‘이슬람지식인연합(ICMI)’이라는 단체를 동부자와주 말랑(Malang)시에서 결성한다.
이 정치단체는 수하르또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출범하였으나, 실은 수하르또 정권의 정체성을 급격하게 변환시키는 전환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1970년대부터 고도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버클리학파’의 핵심 경제관료인 수마를린 재무부장관과 군의 실권자인 베니 무르다니 장군은 쌍두마차를 형성하여 이슬람권 일변도의 정치구조를 다변화시키는 정책으로 방향을 틀고 있던 터였다. 수마를린과 베니의 종교는 가톨릭이었다. 바로 ICMI는 이러한 ‘탈이슬람화’ 기류에 찬물을 끼얹는 반작용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특히 정치사회를 주도하던 국군 상층부내에는 종교적인 신분을 기준으로, 소위 ‘ABRI Merah Putih’와 ‘ABRI Hijau’로 뚜렷하게 양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의 상징색을 집단의 대칭으로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수하르또 대통령이 ICMI로 대변되는 이슬람권과 밀월시대를 열어가던 1990년대 초에 주미대사를 지낸 하스난 하빕 장군이 처음 쓰기 시작한 용어이다. 이때 ‘Merah Putih’그룹, 즉 베니그룹으로 분류되던 장성들로는 뜨리 수뜨리스노(부통령 역임), 에디 수드라잣(육참총장 역임), 헨드로쁘리요노(국정원장 역임) 등이 있었으며, 그 반대편에 서서 ‘탈베니화’를 주도한 이슬람권 군부그룹에는 화이잘 딴중(국군사령관 역임), 하르또노(육참총장 역임) 등이 포함되었으나, 실질적인 기획자는 1995년 특전사령관으로 임명된 대통령의 사위, 쁘라보워 준장이었다.
쁘라보워는 자신과 임관 연배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자키 마까림, 끼블란 젠, 샤프리 삼수딘, 무흐디 장군과 연대하여 이슬람군부 결속화의 선봉에 나선다. 이러한 군부의 양극화 현상은 이후 군부실세로 등장한 위란또, 수기오노, 유도요노 장군의 노력으로 중화되기 시작하였으나, 1998년 5월 22일 쁘라보워 중장의 후임으로 전략사령관으로 임명된 조니 루민땅 중장(현 필리핀대사)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비토 당하며 불과 17시간 만에 하차, 군부 내부에는 여전히 종교차별이라는 뿌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여 내보였다
수하르또 철권정치 기간 중엔 거의 그 모습을 볼 수 없던 여성들의 ‘질밥’ 착용이 어느새 길거리나, 공공장소에서 일반화된 복식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신문의 경제면을 펼치면 샤리아은행 관련기사가 점증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이슬람 율법이 적용되는 아쩨주에서는 태형을 가하는 장면이 언론에 등장하여 시간성과 공간성의 괴리를 느끼게 한다.
무역부장관령 제6호가 4월 16일부로 발효되어 미니마켓과 편의점에서의 맥주 판매가 금지되더니, 국회에서는 아예 알코올 농도 1~5도의 주류에 대한 생산, 유통, 판매를 전면 금지하는 법안을 마련해 금년 연말까지 법안을 통과시킨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이 법안 기초에 앞장선 의원들은 이슬람당인 통일개발당(PPP)와 정의번영당(PKS) 소속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류판매 제한 조치를 국민건강과 종교적 근거에서 찾고 있는 일각에 대해, “맥주 마시고 죽은 사람이 있더냐”며 직격탄을 날린 아혹 자카르타 주지사와 더불어, 적당한 주량의 맥주 몇 잔은 오히려 알츠하이머병을 예방하며 창조적 마인드를 발상시킨다는 ‘독자의 소리’가 들려옴은 일면 안도감을 안겨 주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관광객에 대한 비자면제 정책을 발의하면서도,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의 마실 권리를 제한하는 이중적 잣대가 적용되고 있다. 입법 단계에서 어떻게 결론이 날 지는 몰라도, 어쩌면 맥주 한잔 마실 수 있는 자유도 속박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최근 변경된 취업관련 규정의 여파로 외국인 귀국자가 늘어나는 추세와 맞물려, 그동안 제2고향으로 느껴졌던 인도네시아를 마음속에서 점점 멀어지도록 만드는 주변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그러나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이곳은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취업 차, 사업 차 일시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이국땅이라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어디를 가나 그곳의 법령과 문화와 관습을 존중할 수밖에 없으며, 이에 융통성 있게 순응하는 지혜로움을 발휘하여야 할 것이다.
수하르또 정권이 붕괴되며 민주화운동이 본격화된 지 어언 17년, 예언자 무하맛이 가장 선호하는 색이며, 코란에 자주 언급되고 있다 하여 이슬람의 상징색으로 고착된 ‘초록색(Hijau)’은 지금 인도네시아 곳곳에 스며들어 6월의 신록처럼 점점 더 짙게 채색되어 가고 있다.
<상기 글은 재인도네시아 한인회에서 발행하는 2015년 5월호 '한인뉴스'에 게재된 내용을 필자의 동의를 받아 전재했음>